[재계 잠망경] ‘LG 구겐하임 어워드’ 아트와 테크의 행복한 만남
LG는 뉴욕 타임스퀘어(왼쪽부터),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026년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 트레버 페글렌을 축하하는 영상을 상영했다. 세계 3000만 명이 봤을 것으로 추산된다. [사진 LG]
구광모 LG그룹 대표는 2026년 3월 LG AI 대학원 개원식에 참석해 “기술은 사람들의 미소를 설계하는 따뜻한 도구여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가치를 높이는 도구여야 한다(AI for a better life)는 맥락과 닿아 있다.
실제 글로벌 주요 테크 기업 중에서 LG는 AI에 관한 독특한 철학을 갖췄다. 2022년 그룹 차원에서 선포한 ‘LG AI 윤리원칙’에 그 지향성이 함축돼 있다. 여기서 적시된 5대 핵심 가치는 △인간존중(인간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사회에 유익한 가치 제공) △공정성(다양성을 존중하고 성별, 나이 등에 의한 부당한 차별 방지) △안전성(잠재적 위험을 예측하고 높은 수준의 안전 검증 실시) △책임성(개발 및 활용 전 과정에서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화) △투명성(결과 도출 과정을 설명 가능하게 구현하고 데이터를 투명하게 관리)으로 정리된다.
AI라는 메가 트렌드에 직면해서도 LG는 ‘LG 웨이’를 관철하려는 명료한 포지션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최초로 사내에 AI 대학원을 정식 인가받은 자체부터가 어딘가를 추종하지 않고, LG만의 고유한 길을 걷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비친다.
그렇다면 LG가 추구하는 AI 여정의 최종 종착지는 어디일까. 그 단서는 ‘LG 구겐하임 어워드’라는 의외의 지점에서 포착할 수 있다. LG는 2026년 수상자인 트레버 페글렌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인간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AI 미래를 구축하겠다는 LG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왜 LG는 미술관에서 AI의 철학을 모색할까’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LG 구겐하임 어워드’ 첫 시상은 2023년 이뤄졌다. 2022년 LG는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뮤지엄을 20023년부터 2027년까지 5년간 후원하는 ‘LG-구겐하임 글로벌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현대미술관 구겐하임 뮤지엄과 함께 첨단기술과 문화예술의 융합을 발굴하고 지원하며 LG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활동” 차원에서 시작된 협업이었다. 수상 기준은 ‘기술이 어떻게 예술에 영감을 줄 수 있으며, 예술이 어떻게 기술을 성숙하게 만드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얼마나 충족시켜주는지 여부였다.
작가의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LG 구겐하임 어워드
작가의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LG 구겐하임 어워드’는 2026년 수상자로 미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트레버 페글렌을 선정했다. 버클리대 지리학 박사 출신인 페글렌은 지리학을 예술과 결합한 자기만의 창작 세계를 완성했다. 가령 풍경 사진의 이면에 숨겨진 군사 시설, 해저 케이블의 위치 등을 드러내며 권력 구조와 감시 체계를 시각화한 발상으로 유명해졌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페글렌은 2017년 이후 관심 영역을 디지털 공간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2019년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 ‘이미지넷 룰렛’으로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받았다. 이 작품은 AI가 인간을 분류하는 방식에 내재된 편견을 까발려 세상을 바꿨다는 측면에서 저널리즘적 성격도 지닌다. 1400만 개 이상의 이미지를 보유한 세계 최대 규모의 이미지 데이터베이스 ‘이미지넷’의 판단 알고리즘이 ‘흑인 남성=범죄자’, ‘안경 쓴 사람=괴짜’라는 식의 일방적 낙인을 찍는 현상을 여과 없이 고발한 것이다. 최대한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매년 국제 심사위원단을 바꾸는 ‘LG 구겐하임 어워드’는 ‘오염된 학습 데이터 속에서 AI가 내리는 판단에 인간의 편견과 차별이 녹아들어 있음을 포착해낸’ 페글렌의 작품에 주목했다. 실제 이미지넷 관리 연구팀은 페글렌의 고발과 같은 작품 공개 후 공식 사과와 함께 60만 장의 사진을 삭제하고, 분류 체계를 전면 수정했다.
그의 성취를 인정한 국제 심사위원단은 “기술에 대한 비판적 탐구와 공적 책임, 윤리적 가치를 일깨운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후원사 LG는 페글렌의 수상 축하 영상을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영국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광장의 LG 전광판을 통해 상영했다. LG는 이곳을 찾은 전 세계 시민 3000만 명이 이 영상을 봤을 것으로 추산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로툰다에 한글로 투사된 ‘LG 구겐하임 어워드’ 한국인 첫 수상자 김아영의 이름. [사진 Scott Rudd]
AI·VR·AR 기술 활용한 작품에 주목
202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이 수상했다. 김아영 작가 역시 AI와 VR(가상현실) 등 첨단기술을 예술과 융합한 세계관을 펼쳐왔다. 코로나19 경험에서 나온 대표작 ‘딜리버리 댄서’ 시리즈는 미래도시 서울을 달리는 여성 라이더들과 AI의 상호 작용을 그린 영상물이다. 이 가운데 2022년 작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게임 엔진, 라이다 스캔, 3D 모델링 등을 활용해 AI에 종속된 삶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유명하다. 2024년 후속작인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에선 생성형 AI로 만든 영상과 해시계 조형물로 서구 중심의 시간관에서 탈피해 새로운 인식을 탐구하자는 제안을 건넸다. 나오미 벡위스 구겐하임 수석 큐레이터는 “김아영의 작품은 디지털 시대의 시간과 인간의 경험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지고,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드러낸다 ”고 호평했다.
LG 역시 “신기술을 접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감정을 고려해 기술이 지향해야 할 바를 세심하게 고민하는 LG와도 공명하는 점이 많다”고 평했다.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 이후 김아영은 서울대 경영연구소와 파라다이스문화재단이 공동 발간한 <코리아 아트마켓 2025 보고서>에서 한국 미술시장을 이끄는 ‘파워 20’에 선정됐다. 김아영과 더불어 방탄소년단의 리더 RM, 서도호 작가 등도 이름을 올렸다.
2024년 ‘LG 구겐하임 어워드’ 2회 수상자는 대만 출신 미국 작가 슈리칭이었다. 뉴욕대 영화학 석사 출신인 슈리칭은 디지털 아트, 설치 미술, 영화 제작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30년 넘게 VR, 코딩 등 신기술을 활용한 예술적 실험을 이어왔다. 슈리칭은 인터넷 기술 초창기인 1990년대 소위 ‘넷 아트(인터넷을 활용한 현대미술 장르)’ 분야의 선구자적 존재로 각인된 존재다. 이미 슈리칭의 대표작 8점은 구겐하임 미술관을 비롯해 뉴욕 현대미술관(MoMA), 뉴욕 휘트니 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품 ‘3×3×6’은 소셜미디미어와 CCTV 등 디지털 사회에서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현대인을 다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공상과학, 인종, 젠더 정쳇컹 등을 다루는 대담함과 미래를 예측하는 남다른 시야도 슈리칭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슈리칭은 1990년대 후반부터 가상화폐, 블록체인, 바이오테크 등 미래 사회의 모습을 예견한 통찰력을 보여준 바 있다.
그리고 ‘LG 구겐하임 어워드’의 제1회 수상자는 미국 아티스트이자 뉴욕 스토니브룩대 교수인 스테파니 딘킨스였다. 딘킨스의 작품 테마는 AI, VR, AR(증강현실) 등의 첨단 기술을 20년 넘게 활용해 ‘디지털 시대의 공정과 평등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데 있다.
딘킨스의 대표작으론 ‘비나48과의 대화’라는 영상 작품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실존하는 흑인 여성 비나 로스블랫을 모티브로 삼아 제작된 AI 로봇 ‘비나48’과 딘킨스의 대화를 통해 AI가 학습하는 정보에 인종, 성별, 장애, 문화적 배경 등의 다양성이 고려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딘킨스는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 이후 미국 <타임(TIME)>으로부터 ‘AI 분야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다. 딘킨스는 2025년 10월에는 이문태 LG AI연구원 초지능랩장과 함께 스토니브룩대에서 AI의 창의성과 예술, 인간과의 협업에 대해 논하는 심포지엄도 진행했다. LG와 뉴욕 구겐하임 미술과의 파트너십을 상징하는 자리인 전문 학예 연구 큐레이터 포지션을 맡은 노암 시걸 박의 주선으로 성사된 만남이었다. 향후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기반으로 AI 과학자와 예술가가 만나 테크와 아트의 상호 작용에 관한 담론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로 지명된 예술가에게는 상금 10만 달러와 트로피가 수여된다. 이 트로피는 세계적 디자인 공모전인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 2024’에서 본상을 받았다. LG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메달을 디자인한 SWNA 이석우 디자이너와 협업했다. 디지털을 대표하는 숫자인 0과 1의 형태가 다이내믹하게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해 기술로 새로워지는 미래의 예술을 형상화했다.
‘LG 구겐하임 어워드’ 트로피. 국제 디자인상을 받을 정도로 디지털의 시각화에 성공했다. [사진 LG]
LG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선택한 이유
왜 첨단 테크기업이 현대미술에 주목했는지에 대해 LG는 “기술이 예술의 표현과 경험을 확장하는 매개체가 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답했다. 혁신적 예술가들을 지원함으로써 글로벌 미술계에 자극을 주고, 이는 궁극적으로 LG의 브랜드 가치 향상과 연결될 수 있다.
LG가 미국 뉴욕, 스페인 빌바오,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등에 거점을 둔 구겐하임 미술관을 선택한 이유도 그 상징성에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특히 ‘LG 구겐하임 어워드’로 협업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술관 가운데 세계 최초로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현대미술 거장 바실리 칸딘스키 컬렉션을 포함해 파블로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등의 명작을 보유하고 있다. 연간 110만 명이 방문하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구글 데이터 기반 사진 명소 지도 표시 사이트인 ‘사이츠맵’이 인정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진이 촬영된 장소’다.
LG는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작가는 물론 신예 작가도 발굴하고 있다. LG전자는 뉴욕의 젊은 예술 후원자 협회(YCC)를 후원했다. LG는 최고 화질을 보유한 OLED TV를 통해 이들 작가의 작품을 구현하고 있다. LG의 OLED 기술력이 예술을 위한 디지털 아트 캔버스로 활용되는 셈이다.
김영준 월간중앙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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