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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기고] 법치가 사라진 자리에 전리품만 남길 것인가

지방자치의 역사가 거듭될수록 선거를 통한 권력의 교체는 자연스러운 민주주의의 축제로 자리 잡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정의 첫 페이지는 새로운 비전의 제시가 아닌, 산하기관장들의 거취를 둘러싼 소모적인 갈등으로 채워지고 있다.

[기고] 법치가 사라진 자리에 전리품만 남길 것인가

정권 바뀌면 산하기관장 거취 ‘갈등’ 거듭

인천, 시정 파행 끊고자 조례 제정했지만

여전히 퇴진 압박… 행정력 낭비할 때 아냐

김대중 前 인천시의원

지방자치의 역사가 거듭될수록 선거를 통한 권력의 교체는 자연스러운 민주주의의 축제로 자리 잡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정의 첫 페이지는 새로운 비전의 제시가 아닌, 산하기관장들의 거취를 둘러싼 소모적인 갈등으로 채워지고 있다. 새로운 시정 철학을 온전히 구현하려는 단체장의 의지와 법으로 엄격히 보장된 산하기관장의 임기를 지켜야 한다는 법치주의적 원칙이 강하게 충돌하는 현상이다. 이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민선 9기 박찬대 인천시정부 출범 직후 불거지고 있는 전방위적인 산하기관장 사퇴 압박은 단순한 정권 이양기의 과도기적 진통을 넘어섰다. 그 양상이 법치행정의 근본을 훼손하는 매우 위험한 수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인천시는 이러한 소모적인 인사 갈등과 시정 파행을 제도적으로 끊어내고자 진통 끝에 ‘인천시 출자·출연 기관의 장의 임기에 관한 조례’를 제정한 바 있다. 이 조례의 핵심은 시장과 기관장의 임기를 맞춰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자는 데 있다. 주목할 점은 당시 인천시의회가 조례 부칙에 ‘조례 시행 전에 임명된 출자·출연 기관의 장의 임기는 종전의 임기에 따른다’는 경과조치를 명확히 두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코 전임 시정부의 특정 인사들에게 자리를 보전해 주기 위한 얄팍한 특혜가 아니었다.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도입할 때, 기존에 맺어진 합법적인 법률관계와 권리를 소급하여 무리하게 박탈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신뢰보호의 원칙’이자 ‘소급입법 금지의 원칙’이다. 시의회는 행정을 감시하고 제도를 만드는 입법 기관으로서 이러한 헌법적 가치를 조례에 충실히 반영하는 입법적 결단을 내린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정치적 수사만으로 적법하게 제정된 조례의 부칙을 무시하는 것은 행정의 폭력과 다름없다.

심지어 5개 공사·공단 사장 임기는 이 조례를 적용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시정부와 여당은 기존 기관장들을 향해 ‘알박기’라는 자극적인 정치적 프레임을 덧씌워 거센 사퇴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이 참여하여 만든 조례의 법적 효력을 스스로 부정하는 심각한 모순이다. 불과 얼마 전 야당 시절에는 “법적으로 보장된 임기를 존중하는 것이 순리”라며 핏대를 세우던 이들이 권력을 잡자마자 태도를 180도 바꾸어 퇴진을 종용하는 모습은 300만 시민들의 눈에 낯뜨거운 ‘내로남불’의 전형으로 비칠 뿐이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억지스러운 퇴진 압박이 띠고 있는 불법성이다. 대법원 판례가 명백히 경고하고 있듯, 정당한 제도적 절차를 무시한 채 사퇴를 목적으로 표적 감사를 벌이거나 예산을 무기로 인위적인 압박을 가하는 행위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라는 사법적 단죄를 피하기 어렵다. 행정 권력은 시민을 위해 쓰일 때 정당성을 갖는 것이지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고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한 칼날로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제도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과도기의 불편함은 법과 원칙이라는 넓은 테두리 안에서 인내하며 감내하는 것이 성숙한 민주주의의 자세다. 시 산하 공기업과 출자·출연기관은 승리한 정권이 마음대로 나누어 갖는 전리품이 아니다. 그곳은 300만 인천시민의 일상생활, 안전, 복지와 직결된 막중한 공공 서비스를 책임지는 치열한 현장이다.

지금 박찬대 시정부가 진정으로 시정의 동력을 확보하고 싶다면 밀실에서의 부당한 퇴진 압박에 행정력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그 대신 투명하고 객관적인 경영평가 지표를 들이밀어야 한다. 각 산하기관이 시민을 위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혈세를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냉철하게 검증하고 그 결과에 따라 책임을 묻는 것이 순리다. 법과 조례가 정한 합법적 절차를 짓밟고 들어서는 오만한 권력은 결코 시민의 신뢰라는 튼튼한 기반 위에 서지 못한다. 이제라도 ‘알박기’라는 손쉬운 낙인찍기를 거두고 법치와 제도를 존중하는 책임 있는 시정부의 품격을 보여주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김대중 前 인천시의원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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