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운영 리나시타교양대학 교양교육연구센터장
2025년 가을, 학생들과 21세기 인문가치포럼에 다녀왔다. 강연장을 가득 채운 질문을 들으며 한 가지를 확인했다. 인문의 가치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학생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그 관심을 지속적으로 키울 수 있는 구조가 학교 안에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포럼을 계기로 커리큘럼을 정비하고 학생들이 수업 안에서 능동적 주체로 설 수 있는 과목을 새로 개설했다. 새로운 시도는 늘 예측 불허의 상황을 동반하지만 학생들이 교실 밖 세계와 접속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 연장선에서 2026년 봄, ‘회고 네트워크’ 출범에 합류했다. 철학자, 작가, 개발자, 지역 기자, 농부, 시민 등 각계 50인의 발기인이 모여 ‘전 국민 회고록 쓰기’ 캠페인의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대 인류학과 강정원 교수가 임시운영위원회를 이끌며 방향을 잡았고 출범식에서는 인공지능(AI) 시대 회고하는 인간을 위한 선언문이 발표됐다. 그 선언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기록되지 않은 삶은 망각되지만 회고하는 삶은 역사가 된다.”
이 선언이 단순한 구호로 들리지 않는 이유가 있다. 오늘날 AI는 방대한 양의 정보를 학습하며 인간의 언어와 서사를 모방한다. 그러나 그 학습의 재료가 되는 서사를 누가, 어떤 목소리로, 어떤 삶의 무게를 담아 써 내려가는가의 문제는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이다. 알고리즘에 의해 정의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의 목소리로 기록한 삶만이 자아의 고유성을 증명한다. 회고는 그 증명의 행위다.
경기 북부지역은 이 문제를 가장 구체적으로 제기하는 장소다. 이 지역에는 오랫동안 기록되지 않은 삶들이 있다. 의정부와 동두천에는 수십년간 학교를 묵묵히 지켜온 미화원·경비원 선생님들이 계신다. 동두천에는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온 난민 아이들, 기억이 서서히 흐려지는 어르신들. 이들의 이야기는 주요 언론에 실리지 않고 공식 기록에 남지 않으며 세대를 넘어 전달되지 않은 채 사라진다. 유명인의 연대기만이 역사가 아니다. 시장 상인의 하루, 학교를 돌보는 이름 없는 선생님의 삶, 난민 아이의 목소리가 모여야 비로소 온전한 시대의 초상이 완성된다.
이 믿음을 수업으로 실천하려 한다. 동두천 난민 아이들과 어르신의 이야기를 직접 담는 기록 수업, 우리 대학의 미화원·경비원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자서전 쓰기 및 인생 매뉴얼 수업을 준비하고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소외된 이들의 기록이 사회적 연결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가정을 교실에서 검증하는 작업이다. 회고는 개인의 치유에 머물지 않는다. 고립된 개인이 기록을 통해 타인과 연결될 때 지역 공동체는 세대 간 지혜를 전수하는 회복탄력성을 갖는다.
4월9일 낮 12시, 학생들과 함께 회고 방법론을 배우고 동두천 방식의 실천 계획을 구체화할 예정이다. 화려한 선언보다 한 사람의 기록이 먼저다. 그 첫 문장을 이 도시에서 쓰고자 한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