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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금주의인물] 한 시대 움직인 '세계 경제 대통령' 앨런 그린스펀

1980~2000년대 미국 통화 정책을 상징했던 그린스펀 전 의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 세계 금융 시장은 그의 유산을 다시 평가하고 있다.

[금주의인물] 한 시대 움직인 '세계 경제 대통령' 앨런 그린스펀

18년 동안 연준 이끈 ‘금리 마에스트로’…찬사와 비판이 교차한 정책 유산

[편집자주] <주간한국>은 창간 초기부터 ‘금주의 인물’이란 기획을 통해 매주 시대의 얼굴을 기록했습니다. 정치, 문화, 예술, 사회 각계의 인물들이 한 주의 이슈와 함께 지면을 장식했습니다. 금주의 인물은 단순한 인물 소개를 넘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과 갈등,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생생히 담아내며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번 주 소개할 인물은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중앙은행장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동시에 가장 치열한 재평가를 받은 경제인,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입니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사진=연합뉴스

[주간한국 배예진 기자]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이 지난 22일(현지시간)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1980~2000년대 미국 통화 정책을 상징했던 그린스펀 전 의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 세계 금융 시장은 그의 유산을 다시 평가하고 있다. 그는 1990년대 미국의 장기 호황을 이끈 ‘금리 마에스트로’로 추앙받았지만, 동시에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토대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함께 받는 인물이다. 찬사와 비판이 공존하는 그의 삶은 현대 중앙은행의 역할과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남게 됐다.

192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린스펀은 경제학자가 되기 전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줄리아드음악원에서 클라리넷을 공부했고 젊은 시절 재즈와 스윙 밴드에서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뉴욕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며 진로를 바꿨고 경제 컨설팅 회사를 설립해 명성을 쌓았다. 자유시장주의 철학자 아인 랜드와의 교류는 그의 경제관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절 경제 정책 자문을 맡았고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1987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연준 의장에 취임하며 세계 금융 시장의 중심에 섰다. 당시 그는 인플레이션 억제에 성공하며 명성을 얻은 폴 볼커 전 의장의 후임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화려한 출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린스펀은 연준 의장 취임 두 달 만인 1987년 10월 ‘블랙 먼데이’라는 초대형 금융 위기를 마주했다. 미국 증시가 하루 만에 20% 넘게 폭락하며 시장이 패닉에 빠졌지만, 그는 즉각 유동성 공급 의지를 밝히며 금융 시장 안정에 나섰다. 이 같은 대응은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린스펀이 ‘위기 관리형 중앙은행장’으로 평가받는 출발점이 됐다.

이후 그린스펀은 1990년대 미국 경제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1990~1991년 경기 침체 이후 정보기술(IT) 혁명으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다수 경제학자와 정책 결정자들은 경제 과열을 우려하며 금리 인상을 주장했지만, 그는 기술 혁신이 경제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경제는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약 10년간 장기 확장 국면을 이어갔고 실업률은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물가 역시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며 ‘성장과 물가 안정의 공존’이라는 드문 성과를 기록했다.

이 시기 그린스펀은 마에스트로(Maestro)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장은 그의 발언 하나하나에 주목했고, 의회 증언과 공개 발언은 세계 금융 시장의 주요 이벤트로 취급됐다. 투자자들은 그의 단어 선택과 문장 구조를 분석하며 향후 금리 정책 방향을 예측하려 했다. 그가 사용한 복잡하고 모호한 표현은 훗날 ‘연준 화법’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그린스펀은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위기를 넘겼다.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와 1998년 러시아 금융 위기,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사태, 2000년 닷컴버블 붕괴, 2001년 9·11 테러 이후 경제 충격 등 굵직한 위기 국면에서 연준을 이끌었다. 특히 그는 1998년 LTCM 위기 당시 금융 시장 안정을 위해 주요 금융기관들의 협력을 유도하며 시스템 리스크 확산을 막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린스펀의 영향력은 통화 정책을 넘어 중앙은행 운영 방식 전반에 미쳤다. 그는 재임 중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정책 결정 결과를 보다 신속하게 공개하는 체계를 도입했다. 현재 연준이 정책 결정 배경과 경제 전망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소통 방식 역시 그의 재임 시절 마련된 제도적 변화의 연장선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퇴임 이후 그의 유산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2007년 미국 주택 시장 부실이 금융권 전반으로 확산되며 글로벌 금융 위기의 전조가 나타났고,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을 계기로 세계 금융 시스템이 흔들리자 비판의 화살은 그린스펀을 향했다. 비판론자들은 그가 장기간 유지한 완화적 통화 정책이 자산 시장 거품 형성을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또 금융기관이 스스로 위험을 관리할 것이라는 신념 아래 금융 규제 강화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점도 위기의 원인으로 거론됐다.

실제로 금융 위기 이후 그는 의회 청문회에서 기존 신념이 흔들렸음을 인정했다. 그는 금융기관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위험을 적절히 통제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고 밝히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린스펀을 향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1990년대 미국 장기 호황을 이끌고 연준의 위상과 영향력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20세기 최고의 중앙은행장 가운데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는 반면, 저금리 기조와 금융 규제 완화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비판도 함께 따른다. 영웅과 책임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그의 삶은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과 금융 시장 규제의 균형을 둘러싼 논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배예진 기자 byj@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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