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상자산 거래 가능 이용자가 1000만명을 넘어서고, 거래 규모 역시 하루 수조원에 달하는 등 가상자산 시장의 외형은 이미 제도권 금융에 근접했다. 반면 이처럼 커진 시장을 규율할 기본 법제는 여전히 공백 상태에 머물러 있다.
제도 공백을 메우기 위해 추진된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지난 2023년 시행된 이용자 보호 중심의 1단계 법을 넘어 산업 구조 전반을 설계하는 핵심 입법이다. 그러나 정작 국회 논의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치 일정과 대외 변수, 핵심 규제에 대한 이해관계 충돌까지 겹치며 법안은 입법 문턱에서 장기간 표류 중이다.
입법 지연에 따른 부담은 고스란히 업계에 전가되고 있다. 업계는 법 통과를 전제로 사업을 준비해왔지만 일정이 불투명해지면서 투자와 신규 사업 추진이 잇따라 미뤄지는 모습이다. 여기에 지분 규제와 과세를 둘러싼 논쟁으로 향후 방향성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시장은 확대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기준은 정해지지 않은 상황, 가상자산 산업은 지금 갈림길에 놓여 있다.
가상자산 입법, 무기한 연기
금융위원회 외부 깃발 [사진=연합뉴스]
[더퍼블릭=손세희 기자] 디지털자산기본법은 가상자산 시장을 제도권으로 편입하기 위한 대표적인 입법으로, 거래소 인가제 도입과 시장질서 규율, 투자자 보호 체계 구축 등을 담은 이른바 ‘가상자산 2단계 법안’이다.
지난 2023년 시행된 이용자 보호 중심의 1단계 법에 이어 산업 전반의 구조와 규제를 설계하는 기본법 성격을 갖는다. 주요 내용에는 거래소 진입 규제 강화, 공시 및 내부통제 기준 마련, 스테이블코인 발행 구조, 그리고 대주주 지분 제한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 법안은 현재 입법 단계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과 금융위원회는 이달 중순 협의를 통해 법안 최종안을 조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일 예정됐던 논의는 열리지 않았고, 이후에도 구체적인 일정이 잡히지 않으면서 일정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표면적 이유는 대외 변수다. 3월 중순 이후 중동 지역 긴장 고조와 이에 따른 정부 대응, 추가경정예산 편성 논의가 급부상했다. 여기에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 일정이 겹치면서 입법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치권 내부에서는 보다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가상자산 거래소 지분 제한, 스테이블코인 발행 구조, 인가제 전환 등 핵심 쟁점에서 정부와 여야, 업계 간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이달 기준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안건에도 해당 법안은 포함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상반기 내 법안 처리 가능성은 크게 낮아진다. 일부에서는 최소 6월 지방선거 이후로 논의가 넘어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입법 지연은 산업 전반의 의사결정 지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상자산 업계는 작년 하반기부터 2단계 법안 통과를 전제로 사업 전략을 수립해 왔다. 그러나 일정이 불투명해지면서 투자 집행과 신규 사업 추진이 보류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시장 규모는 이미 제도 정비 필요성을 넘어선 상태다. 금융위 자료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기준 국내 가상자산 거래 가능 이용자는 1077만명으로, 2021년 약 580만명 대비 약 85% 증가했다. 업계에서는 중복 계정과 해외 거래 이용자까지 포함할 경우 약 1300만명 수준으로 추산한다.
거래 규모 역시 커졌다. 지난해 기준 일평균 가상자산 거래금액은 약 6조4000억원으로 집계됐는데, 변동성이 큰 시기에는 하루 거래금액이 10조원을 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거래소의 역할도 확대됐다. 매매 플랫폼 기능 뿐 아니라 원화 입출금, 자산 보관, 코인 상장, 내부 심사까지 수행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를 근거로 거래소를 ‘준금융기관’ 또는 ‘공공 인프라 성격’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업계는 다른 시각을 보인다. 가상자산 거래소는 공적 인프라가 아니라 민간 스타트업과 플랫폼 기업이 경쟁을 통해 성장한 시장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당국이 규제 강도를 결정하기 전에 산업의 본질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주주 지분 규제에 업계 반발
비트코인 이미지 [로이터=연합뉴스]
디지털자산기본법 논쟁의 중심에는 거래소 대주주 지분 제한이 있다. 현재 검토되는 안은 개인 20%, 법인 34%를 상한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를 초과하는 지분은 일정 기간 내 매각해야 한다.
이 규제는 국내 거래소들의 현 상황에 비춰봤을 때 강제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기존 지분 구조를 법으로 변경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국내 주요 거래소 지분율은 모두 규제 기준을 초과한다.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의 경우 최대주주 지분이 25.52%다.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는 최소 5%p 이상을 매각해야 한다.
빗썸은 상황이 더 극단적이다. 빗썸홀딩스의 지분율은 73.56%로, 규제 적용 시 절반 이상을 매각해야 한다. 코인원은 53.44%, 고팍스는 67.45%, 코빗은 약 90% 수준으로 모두 대규모 지분 조정이 불가피하다.
업계에 따르면 지분 매각 규모는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에 이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업비트의 기업가치를 약 20조원 수준으로 가정할 경우, 5% 지분은 약 1조원이다. 빗썸의 경우 매각 대상 지분이 40% 이상이어서 총 규모는 수조원대에 달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매각 방식이다. 대부분 거래소가 비상장 상태이기 때문에 공개 시장에서 지분을 처분하기 어렵다. 결국 대형 금융기관이나 사모펀드, 해외 자본이 주요 매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법적 논쟁도 깊어지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이달 보고서를 통해 해당 규제가 헌법상 재산권(제23조)과 직업의 자유(제15조)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특히 이미 취득한 지분에 대해 사후적으로 매각을 강제하는 방식은 과잉금지원칙 위반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주요 법무법인들은 대주주 지분 제한이 도입될 경우 위헌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관련 소송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해외 사례를 놓고보면 국내 규제 방식과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일례로 유럽연합의 MiCA 규제는 대주주의 적격성, 내부통제, 공시 의무 등을 중심으로 설계됐다. 지분율 자체를 제한하는 조항은 없다.
미국과 일본 역시 지분 구조보다는 사업 범위와 내부통제 규제를 중심으로 접근한다. 이 때문에 국내 규제가 글로벌 기준과 괴리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융당국은 거래소가 상장, 거래, 보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이해상충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 지분 제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일부 거래소에서 코인 오지급 사고가 발생해 가격이 단시간에 10% 이상 급락한 사건 등은 거래소 권한 집중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
다만 규제 방식에 대해 거래소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분 제한 대신 의결권 제한, 내부통제 강화, 공시 의무 확대 등 대안이 존재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 거래소 경쟁력 약화 우려도
국내 대표 플랫폼 네이버와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가 ‘계열 통합 추진’에 따른 미래 청사진을 지난해 11월 27일 공식 발표했다. [사진=연합뉴스]
지분 규제 논의는 이미 기업 활동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올해 상장을 목표로 기업공개(IPO)를 추진 중인 빗썸의 경우, 지분 제한 규제가 도입되면 상장 이전 대규모 지분 정리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네이버파이낸셜과 두나무의 합병 추진도 규제 변수에서 자유롭지 않다. 양사는 지난해 11월 포괄적 주식교환 방식의 합병을 추진키로 했지만, 합병 이후 송치형 두나무 회장의 네이버파이낸셜 지분율(19.5%)에 특수관계인인 김형년 부회장 지분(10%)을 더하면 총 29.5%로 규제 상한을 넘어서게 된다.
이에 따라 네이버파이낸셜이 두나무 지분을 100% 보유하는 현 지배구조 역시 조정이 불가피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지난 2월 13일 공시된 미래에셋컨설팅의 코빗 인수 역시 같은 흐름으로 보인다. 미래에셋컨설팅은 약 1334억8000만원을 투입해 코빗 지분 92.06%(약 2690만주)를 확보했는데, 이는 기존 최대주주 NXC(60.5%)와 2대 주주 SK플래닛(31.5%) 지분을 전량 현금으로 인수하는 구조다.
향후 관련 법안이 확정될 경우, 미래에셋 역시 규제 기준에 맞춰 지분을 재조정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거래소 입장에서는 내년부터 시행될 가상자산 과세도 부담의 한 축이다. 소득세법에 따라 2027년 1월 1일부터 연간 250만원을 초과하는 가상자산 수익에 22%의 세율이 적용될 예정이다. 다만 해외 거래소 이용자에 대한 과세 방식이나 에어드롭·스테이킹 수익의 과세 기준 등은 여전히 불명확한 상태다.
업계에서는 과세와 규제가 동시에 시행될 경우 국내 거래소의 경쟁력이 더욱 약화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과세가 이뤄지면 세 부담에 대한 반감으로 투자자들의 자금이 해외로 이동해 시장 전반의 위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지분 제한까지 현실화되면 자본 구조 재편 역시 피하기 어렵다. 대규모 지분 매각 과정에서 외국계 자본이나 사모펀드의 참여 가능성이 커지면서, 국내에서 성장한 거래소의 지배력이 해외로 넘어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가상자산 시장은 거래량 감소, 규제 리스크, 과세 논쟁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추진된 디지털자산기본법 역시 입법 지연과 규제 논쟁 속에 방향성을 잡지 못하면서 시장의 불확실성만 키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더퍼블릭 / 손세희 기자 sonsh821@thepub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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