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시스템이 부동산 중심의 자금 흐름과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구조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금융을 ‘기본권’ 차원에서 재정의하고 성장 전략과 결합하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금융을 주거·교육과 마찬가지로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 인프라로 보고, 또 금융기본권을 ‘성장 정책’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경훈 동국대학교 교수는 지난 27일 더불어민주당 민병덕·오기형·이정문 의원과 한국경제법학회, 한국금융소비자학회 등이 공동 개최한 정책토론회에서 ‘국민의 금융기본권 보장을 위한 패러다임 전환’을 주제로 발표하며, 이를 제안했다.
강 교수는 우선 한국 금융의 핵심 문제를 ‘생산적 투자 부재’로 규정했다. 자금이 혁신 산업이나 기술 분야로 흐르지 못하고 부동산 시장에 집중되면서 경제 성장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금융기관의 리스크 회피 성향이 이러한 흐름을 고착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담보 중심 대출 구조, 특히 주택담보대출 중심 영업은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지만, 혁신 기업이나 저신용 계층에 대한 금융 공급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이를 “노골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구조적으로 작동하는 ‘조용한 약탈적 금융’”이라고 표현했다. 자산을 보유한 계층은 저금리와 자산 가격 상승의 혜택을 누리는 반면, 그렇지 못한 계층은 금융 접근 자체가 제한되거나 고금리 시장으로 밀려난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구조는 자산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2025년 기준 상위 10분위의 자산 점유율은 46.1%까지 상승했으며, 하위 계층의 자산은 감소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소득 불평등은 일부 완화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지만, 자산 불평등은 구조적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금융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금융 접근성 악화는 사회 문제=
금융 취약계층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저신용자 대상 신규 신용대출 공급은 2021년 대비 크게 감소했고, 전체 신용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축소됐다.
반면 비은행권 대출 연체율은 상승하고 있다. 특히 저소득층일수록 연체율이 높고 상승 폭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금융 접근성이 낮은 계층이 더 높은 위험에 노출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강 교수는 “은행권에서 배제된 취약계층이 저축은행이나 대부업 등 고금리 시장으로 이동하면서 금융 비용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며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리스크”라고 설명했다.
가계의 금융 부담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금융부채 보유 가구 중 64%가 원리금 상환을 부담스럽다고 응답했고, 상당수는 소비와 투자를 줄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내수 위축과 성장 둔화로 이어질 수 있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정책서민금융 확대에도 한계=
정책서민금융은 이러한 문제를 완화하는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해왔다. 공급 규모는 꾸준히 확대됐고, 금리 부담 완화와 금융 접근성 개선에도 기여했다. 특히 정책상품 이용자 상당수가 “민간 금융기관에서 대출이 거절돼 이용했다”고 응답할 정도로 ‘최후의 안전망’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강 교수는 정책서민금융이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가장 큰 문제는 사후 대응 중심 구조다. 이미 연체나 채무 문제가 발생한 이후 지원이 이뤄지기 때문에 예방 기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또한 엄격한 소득·신용 기준으로 인해 경계선 계층이 배제되는 문제도 제기됐다. 실제로 정책금융 대상에서 탈락한 계층이 불법 사금융이나 고금리 시장으로 유입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정책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강 교수는 “현재는 공급자 중심, 자격 요건 중심의 표준화된 상품 구조”라며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금융 지원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은 선택이 아닌 권리다”=
강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기본권’ 개념을 제시했다. 금융을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 인프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금융서비스 접근이 없으면 결제, 저축, 송금 등 일상적인 경제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금융 접근권은 주거·교육과 마찬가지로 기본권 차원에서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금융 취약성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리스크로 확산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유동성 위기는 채무 위기로, 이는 빈곤 고착과 양극화로 이어지는 연쇄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금융기본권은 사회 안전망이자 경제 시스템의 안정 장치로 기능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강 교수는 금융기본권을 ‘성장 정책’ 관점에서도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 접근성이 보장되면 교육 투자와 창업 기회가 확대돼 인적 자본 축적이 가능해지고, 이는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소상공인과 스타트업이 자본시장에 접근할 수 있어야 혁신이 확산되고, 자본이 보다 효율적인 분야로 이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민주당 민병덕·오기형·이정문 국회의원과 서민금융진흥원, 한국상사판례학회, 한국경제법학회, 한국금융소비자학회, 한국증권학회, 한국소비자학회 등은 27일 ‘국민의 금융기본권 실현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공동개최했다. (사진=중기이코노미)
“금융기본권은 혁신의 저변을 확대”=
특히 정부가 강조하는 ‘기술 주도 성장’과 금융기본권은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분석했다. 강 교수는 “기술 혁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실패 가능성도 높아진다”며 “재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금융 안전망이 없다면 혁신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고 했다. 즉 금융기본권은 혁신의 저변을 확대하고, 자산이 부족한 개인이나 기업도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통행증’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다. 또한 기술 격차가 금융 격차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방어선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디지털 금융은 금융기본권 확대의 핵심 수단으로 꼽힌다. 오픈뱅킹, 마이데이터, 대안신용평가 등은 금융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인프라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고령층 등 디지털 취약계층은 오히려 금융 서비스에서 배제될 수 있다”며 “알고리즘 편향, 데이터 독점 등 새로운 문제도 등장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한국은 개별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분절된 상태라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오픈뱅킹, 마이데이터, 소상공인 신용평가 시스템 등이 ‘사일로’처럼 따로 작동하고 있다”며 “데이터 연계와 표준화, 공공 신용 인프라 강화를 통해 통합적 금융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금융이 특정 자산과 계층에 집중되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지속 가능한 성장도 어렵다”며 “금융을 기본권 관점에서 재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기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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