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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굿모닝 예향] 문불여장성, 500년 학문의 향기…‘필암서원’의 선비정신

장성은 예부터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 불렸다. 학문으로는 장성을 따를 곳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뛰어난 선비를 많이 배출했다는 의미를 넘어 배움을 삶의 근본으로 삼아온 장성 사람들의 자부심을 담고 있다.

[굿모닝 예향] 문불여장성, 500년 학문의 향기…‘필암서원’의 선비정신

[굿모닝 예향] 문불여장성, 500년 학문의 향기…‘필암서원’의 선비정신

2026년 08월 31일(월) 16:30

하늘에서 내려다본 필암서원. 500년 학문의 전통을 품은 한국 대표 서원의 단정한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최현배 기자

장성은 예부터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 불렸다. 학문으로는 장성을 따를 곳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뛰어난 선비를 많이 배출했다는 의미를 넘어 배움을 삶의 근본으로 삼아온 장성 사람들의 자부심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장성은 수많은 유학자를 배출하며 호남 유학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쳤고, 학문과 예를 숭상하는 전통이 지역 곳곳에 깊게 뿌리내렸다.

그 중심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청백리의 상징인 하서 김인후(1510~1560)가 있다. 그는 성리학자이자 문장가였으며, 권세보다 의리를 택한 청백리였다. 인종이 세상을 떠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과 후학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높은 학덕과 절의는 후대 유림의 존경을 받았고 오늘날까지도 필암서원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필암서원 유물전시관에는 하서 김인후의 친필과 목판, 서적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어 서원의 역사와 정신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김인후의 학문과 절의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필암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에 이름을 올리며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이 됐다. 필암서원의 진짜 가치는 오래된 건물에만 있지 않다. 500년 전 선비들의 배움과 정신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과 교육으로 이어지는 살아 있는 공간이 되고 있다.

필암서원 유물전시관 내부.

필암서원을 제대로 만나고 싶다면 경내보다 먼저 유물 전시관을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하서 김인후의 삶과 학문, 서원이 세워진 배경을 미리 알고 걸으면 건물 하나, 현판 하나에 담긴 의미도 깊게 읽힌다. 단순히 오래된 건축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이야기가 깃든 공간을 만나게 된다.

전시관을 나와 마주하는 첫 풍경은 붉은 홍살문과 그 너머로 우뚝 선 확연루다. 홍살문은 신성한 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문이다. 붉은색을 통해 귀신을 물리치고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물이다. 붉은 기둥 위에 화살 모양의 살을 세우고 태극 문양과 3지창을 올렸다.

문 앞에는 하마석이 놓여 있다. 아무리 높은 벼슬을 지닌 사람이라도 이곳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신분보다 예를 먼저 세우는 공간, 그 마음가짐은 서원의 첫인상으로 다가온다.

청절당 내부. 선비들이 학문을 강론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공간이다.

홍살문을 지나면 필암서원의 상징인 확연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다. ‘확연(廓然)’은 넓고 크며 막힘없이 열린 경지를 뜻한다. 우암 송시열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현판이 걸려 있다. 이름 그대로 학문의 세계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여는 문과도 같은 공간이다. 허리를 살짝 숙이고 확연루 아래를 천천히 걸어 통과하는 순간, 그 옛날 선비들의 배움터로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 든다.

확연루를 지나면 넓은 마당인 유식 공간 너머 청절당이 자리한다. 필암서원의 중심 강학 공간인 청절당은 유생들이 공부하고 토론하던 곳이다. ‘청절(淸節)’이라는 이름은 하서 김인후의 맑고 곧은 절개를 기린다. 건물 안에는 필암서원과 관련된 여러 편액과 시문이 걸려 있어 학문을 중시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청절당 양옆에는 유생들이 생활하던 승의재와 진덕재가 자리한다. 강학 공간과 생활 공간이 한 울타리 안에 함께 배치된 모습은 서원이 단순히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먹고 자며 인격을 닦는 생활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공부와 삶이 분리되지 않았던 선비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다.

필암서원의 현판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전시. 글씨마다 서원의 역사와 정신이 담겨 있다.

필암서원의 안쪽에는 교육 공간과 구분된 제향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는 하서 김인후를 비롯한 선현들에게 제향을 올렸다. 서원은 학문을 익히는 곳인 동시에 스승을 기억하고 예를 배우는 공간이었다. 교육과 제향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구조는 한국 서원만의 독특한 특징이기도 하다.

필암서원이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 뿐만 아니라 자연과 어우러진 공간 배치, 강학과 제향이 공존하는 구성, 성리학의 교육 철학을 온전히 담아낸 가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건물 하나하나보다 그 안에 담긴 정신이 더 큰 유산인 셈이다.

필암서원은 과거 속에 머무는 문화유산이 아니다. 최근에는 서원 건물을 활용한 작은도서관이 운영되고 있다. 이름은 ‘하서 작은도서관’. 서원내 여러 건물에 분산 관리하던 각종 유학 관련 서적을 찾기 쉽고 보기 편하게 한 군데로 모아 집중 관리하자는 소박한 동기에서 출발했다. 작은방이지만 과거 선비들이 공부하던 공간에 앉아 책을 읽는 기분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김인후의 학문과 절의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필암서원.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에 이름을 올렸다.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꾸준히 열린다. 역사 강연과 서예 체험, 어린이 선비 체험, 한글 퀴즈 등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가 마련되며,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촬영지로도 소개되면서 젊은 세대와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올 가을에는 더욱 특별한 행사가 예정돼 있다. 장성군은 ‘K-선비문화 프로젝트’의 하나로 ‘2026 문불여장성 과거시험 재현행사’를 개최한다. 참가자들은 강독, 한시, 책문 가운데 한 분야를 선택해 조선시대 과거시험 방식으로 실력을 겨루게 된다. 단순한 체험 행사가 아니라 하서 김인후의 문과 급제와 선비문화를 오늘의 방식으로 되살리는 의미 있는 시도다. 과거의 정신을 현재의 문화로 이어가는 필암서원의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필암서원을 차분히 둘러보고 나오는 길, 아쉬움에 되돌아서 서원 곳곳을 눈에 담아본다. 하늘을 향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기와지붕 아래에서는 500년 전에도 배움이 이어졌고,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서원은 여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보람·김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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