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철 부산대 기계공학부 교수
지난 1월 국제가전박람회(CES)에서 현대차그룹의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선보인 로봇 ‘아틀라스’는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지난 10여 년간 거대언어모델을 중심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 디지털 AI 시대를 넘어, 이제 AI가 물리적 실체를 갖고 현실 세계에 직접 개입하는 ‘피지컬 AI’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실감케 한 순간이었다. 이미 스마트폰 속 AI가 실시간 통역을 하고 간단한 업무를 보좌하고 있다. 앞으로는 이런 수준을 넘어 완전 자율주행차와 AI 로봇이 공장, 물류 및 건설 현장, 그리고 가정의 풍경까지 완전히 바꿔 놓게 될 것이다.
문제는 에너지다. AI 서비스의 심장인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중단 없이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전기 먹는 하마’다. 생성형 AI 모델은 일반 검색 엔진보다 수십 배 전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이를 지탱할 안정적이고 풍부한 전력 공급은 AI 시대의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 됐다. 특히 피지컬 AI가 보편화돼 로봇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면 산업계의 원가 방정식은 완전히 재편된다. 과거 재화의 원가 구조에서 가장 큰 변동성을 가졌던 인건비 자리를 이제는 전기료가 대신하는 것이다. 즉, 휴머노이드 로봇 한 대를 가동하는 ‘시간당 전기 비용’이 인간의 ‘최저 임금’을 대체하는 시대, 물건과 서비스의 가격 경쟁력이 국가의 전력 단가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그렇다면 막대한 전력을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전력원은 무엇인가?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는 기상 조건에 따른 변동성이 크고, 국토가 좁은 한국의 환경에서는 발전 단가가 200원/kWh에 달해 경제적 부담이 크다. 반면, 원자력 발전은 대량의 전력을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단가 또한 70원/kWh 수준으로 국내 발전원 중 가장 저렴하다. 이미 미국에서는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의 전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멈췄던 원전을 재가동하거나 소형모듈원전(SMR)에 수조 원을 투자하는 등 ‘원자력 회귀’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에너지 경쟁력은 국내 산업계에도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현대제철이 국내 인천공장의 일부 설비를 폐쇄하고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8조 원 규모의 전기로 제철소를 짓기로 한 결정은 우리에게 뼈아픈 경종을 울린다. 전기로를 주력으로 하는 제철 산업에서 루이지애나의 저렴한 전기료(약 90원/kWh)와 한국의 높은 요금(약 180원/kWh) 차이는 기업의 생존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수년간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비용 증가를 산업용 전기료에 전가하며 요금을 단기간에 80%가량 폭등시켰다. 그 결과 산업용 전기요금이 가정용 전기요금보다 비싼,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기형적인 요금 구조가 됐다. 이처럼 기형적인 요금 구조가 지속되면, 전력 다소비 기업들의 ‘에너지 망명’은 철강을 넘어 반도체, 자동차 산업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 공정이 자동화되고 로봇 도입이 늘어날수록 제품 원가에서 전기료 비중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가 수립 중인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은 엄중한 현실을 담아내는 국가적 설계도가 돼야 한다. 단순히 과거의 수요 예측 모델에 머물지 않고, 폭발적인 AI 수요와 산업 전반의 전기화를 감당할 수 있도록 대형 원전의 전략적 배치와 조기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특히 산업단지 인근에 전력을 직접 공급할 수 있는 SMR의 확대 건설을 이번 계획에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
원자력 중심의 무탄소 에너지(CFE) 체계 구축은 탄소중립이라는 환경적 목표를 넘어,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며 피지컬 AI 혁명을 주도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경제적 토대다. 정부는 이번 12차 전기본을 통해 원전 생태계를 완전히 복원하고 값싼 전력 공급망을 확립하여, 대한민국이 AI 시대에도 변함없는 제조 강국으로 비상할 수 있는 튼튼한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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