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꾹! 뻐꾹!”
숲길을 걷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뻐꾸기 노래에 자꾸 걸음을 멈추게 된다. 어린 시절 불렀던 노래도 떠오른다. “뻐꾹, 뻐꾹 봄이 가네. 뻐꾸기 소리 잘 가란 인사 복사꽃이 떨어지네.”
뻐꾸기는 보통 5월 무렵 우리 곁을 찾아오는 여름 철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 봄이 천천히 물러가고, 어느새 여름이 숲 가장자리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 꼬리명주나비 수컷
요즘 필자의 마음을 가장 애태우는 친구가 있다. 바로 ‘꼬리명주나비’ 애벌레다.
4월 중순 무렵 날개돋이를 한 꼬리명주나비들이 여기저기 알을 낳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애벌레들이 부화했다. 문제는 먹이다. 애벌레들이 먹고 살아가는 유일한 식물인 쥐방울덩굴이 턱없이 부족하다. 연한 잎은 이미 대부분 갉아먹었고, 이제는 줄기마저 뜯어 먹고 있는 상황이다.
안타깝지만 다른 곳에서 쥐방울덩굴을 구해다 주기도 쉽지 않다. 그만큼 이 식물 자체가 귀해졌기 때문이다.
꼬리명주나비는 우리나라에 사는 나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나비로 손꼽힌다. 이름 속 ‘명주’라는 말처럼 날개에는 은은한 비단빛이 감돈다. 여기에 뒷날개 끝으로 길게 늘어진 꼬리까지 더해져, 마치 흰 비단 조각 하나가 봄바람을 타고 하늘을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처음 이 친구를 만났을 때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햇살 사이를 느리게 나는 그 우아한 날갯짓에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꼬리명주나비는 암수 모습도 뚜렷하게 다르다. 수컷은 밝고 흰빛이 도는 반면, 암컷은 검은빛이 감도는 회색을 띤다. 서로 전혀 다른 나비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나비를 자연 속에서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유는 분명하다. 애벌레가 오직 쥐방울덩굴만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쥐방울덩굴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유지되어야만 꼬리명주나비도 살아갈 수 있다. 숲 가장자리의 적당한 햇볕, 덩굴이 뻗어갈 공간, 지나치게 거세지 않은 바람. 이런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꼬리명주나비가 그 자리에 머문다.
옛날 밭둑 주변에는 쥐방울덩굴이 흔했다. 낙하산을 거꾸로 매달아 놓은 듯한 열매를 보며 사람들은 ‘까마귀 오줌통’이라 부르곤 했다. 아이들은 그것을 따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무분별한 제초제 사용과 도시 개발, 그리고 기후 변화까지 겹치며 쥐방울덩굴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 꼬리명주나비 암컷
쥐방울덩굴이 사라지면 꼬리명주나비도 함께 사라진다.
하나의 식물이 줄어든다는 것은 단순히 식물 한 종이 없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 식물에 삶을 의지하던 또 다른 생명들까지 함께 흔들린다는 뜻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여러 지자체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복원 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일부 생태공원에서는 다시 꼬리명주나비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자연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아한 꼬리명주나비는 사실 독을 품고 살아가는 나비이기도 하다.
애벌레의 먹이식물인 쥐방울덩굴에는 독성이 있다. 대부분의 동물에게는 위험한 식물이지만 꼬리명주나비 애벌레는 그 독성 물질을 몸속에 축적해 자신을 지키는 무기로 사용한다. 천적에게 보내는 경고인 셈이다. “나는 맛없는 존재다! 함부로 먹지 마!”
꼬리명주나비의 선명한 무늬와 존재감 있는 모습도 이런 경고를 담고 있다. 왜 그럴까. 이 친구는 다른 나비들처럼 분주하게 날아다니지 않는다. 마치 봄날의 공기를 천천히 음미하듯 느리고 부드럽게 하늘을 떠다닌다. 조급함 대신 여유가 느껴지는 날갯짓이다. 독을 품은 자의 여유라고 할까?
그러나 그 우아함은 결코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아름다운 날갯짓의 이면에는 애벌레 시절 독초를 먹으며 견뎌낸 치열한 생존의 시간이 숨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작은 생명에게서 배워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여유와 품격은 보이지 않는 인내와 견딤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 말이다.
< 청개구리 쌤 지영군 곤충교육전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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