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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제발언대] 허들을 넘지 않는 기업들의 나라

스타트업도 다르지 않다. 글로벌 기준으로 시드에서 시리즈 A로, 다시 시리즈 B로 넘어갈 확률은 각각 20%에 못 미친다. 비수도권에서 이 관문을 통과하기는 더욱 어렵다. 투자 인프라와 VC 네트워크가 수도권에 집중돼...

[경제발언대] 허들을 넘지 않는 기업들의 나라

중견기업으로 진입 꺼리는 中企

성장하면 혜택 끊는 제도가 문제

뛰는 기업이 보상받는 구조 시급

양승훈 _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육상 경기에서 허들은 넘기 위한 장애물이다. 허들에 기대거나 우회하면 실격이다. 선수들은 뛰어오던 탄력을 이용해 허들을 넘는다. 그런데 한국 중소기업은 허들 앞에 멈춰 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넘으면 손해고, 서 있으면 지원이 나오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의 전환을 유예한 기업이 2020년 949개에서 2024년 1377개로 45% 늘었다. 중소기업의 중견기업 연간 진입률은 0.04%에 머물렀다. 더 놀라운 것은 중견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되돌아간 기업이 427개인데,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은 103개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규모를 키우려는 기업보다 줄이려는 기업이 네 배 많은 나라,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풍경이다. 1990년 이후 대기업으로 성장한 중소기업은 셀트리온과 에코프로 단 두 곳뿐이다.

이유를 찾긴 어렵지 않다. 중소기업으로 분류되면 상당한 예산 지원을 받을 기회가 열린다. 하지만 중견기업이 되는 순간 사정이 뒤바뀐다. R&D 세액공제율은 25%에서 8%로 급락하고, 최저한세율은 7%에서 10%로 뛴다. 자산총액 500억~1000억원 미만 중소기업에 적용되는 규제가 4개인 반면, 5000억원 이상 중견기업에는 최대 185개의 규제가 적용된다. 성장하면 벌 받는 구조다. ‘피터팬 증후군’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기업이 아닌 제도가 문제다.

스타트업도 다르지 않다. 글로벌 기준으로 시드에서 시리즈 A로, 다시 시리즈 B로 넘어갈 확률은 각각 20%에 못 미친다. 비수도권에서 이 관문을 통과하기는 더욱 어렵다. 투자 인프라와 VC 네트워크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스케일업을 꿈꾸는 기업은 본사를 서울로 옮기거나 지역에 남아 정체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

어렵게 투자를 유치해도 적절한 기업에 인수·합병돼 기술과 규모를 키우기보다 사장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M&A를 통한 스케일업 생태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도전하는 기업은 지역을 떠나고, 보조금에 기대 현상 유지하는 기업만 남는 역선택이 구조화됐다.

그 귀결이 한계기업 비중 17.1%라는 수치다.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못 갚는 기업이 다섯 곳 중 한 곳에 달한다. 3년 이상 한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만성적 한계기업 비중도 44.8%까지 치솟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계기업이 10%포인트 늘면 정상기업의 매출성장률이 2%포인트, 영업이익률이 0.5%포인트 하락한다. 좀비가 산 자의 성장을 잡아먹는 구조다.

중소기업 정책의 목표는 기업을 중소기업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다. 허들을 넘어 중견으로, 다시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도약하도록 발판을 놓는 것이어야 한다. 중소기업의 1인당 노동생산성은 1억3800만원이지만, 중견 규모로 올라서면 2억7680만원으로 두 배가 된다.

기업이 허들을 넘을 때 일자리의 질도 함께 뛰고, 지역 경제도 체력을 갖춘다. 지금은 AI 전환이라는 새로운 허들이 제조 현장에 들이닥친 시점이다. AI 도입에는 데이터 인프라, R&D 인력, 초기 투자 여력이 필요한데, 허들 앞에 멈춰 선 기업에게는 그 어느 것도 갖출 여유가 없다. 규모를 키우지 못하는 기업은 AI 시대의 생산성 격차에서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올해 중소기업 졸업 후에도 세제 혜택을 단계적으로 줄이는 ‘점감 구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방향보다 속도가 문제다. 허들 앞에 멈춘 기업에게 필요한 것은 허들을 낮추는 일만이 아니다. 넘었을 때 더 넓은 트랙이 열린다는 확신과 뛰는 기업이 보상받는 생태계다.

뛰는 기업에 지원이 집중돼야 하고, 한계기업 연명에 쓰이는 자원은 재배치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방에는 보조금으로 버티는 기업만 남고, 도전하는 기업은 계속 수도권으로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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