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센터 핵심은 정밀가공 기술
中企 역량 AI 분야로 확장할 시점
큰 변화보다 작은 방향수정이 중요
조주현 _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원장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흥미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AI는 흔히 소프트웨어 산업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시장이 정작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제조기업이다. 실제 공장을 돌리고 부품을 만드는 기업들 말이다.
요즘 AI 담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피지컬 AI’, 즉 휴머노이드 로봇과 자율주행차, 그리고 AI 공장이라 일컬어지는 ‘데이터센터’도 결국, 기계와 장비, 정밀 부품과 자동화 제조 기술이 있어야 함께 돌아간다.
코스피를 뜨겁게 달구는 국내 대표 기업도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반도체 부품을 제조하는 기업이다. 그만큼 화려하게 드러나지는 않아도 감속기와 액추에이터, 산업용 기어와 전력 부품 같은 정밀 가공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의 잠재적 가치에도 시장은 주목한다. 한동안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AI 기업에 쏠렸던 관심이, 물리적 현장에 연결되는 제조 역량과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들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을 보는 현자들은 “지금이 중소제조업의 혁신이 필요한 시기”이고, “아직 희망이 있다”, “그러니 혁신하라”고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혁신의 필요성을 모르는 기업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누가 몰라서 안 하나.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지금을 확실하게 살아내야 하는 것이 중소 제조업의 현실이다.
원가 상승과 금리 부담, 인력난과 현금난의 압박 속에서 오늘을 무사히 넘기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특히 기존 거래처와의 납품 구조를 지켜내야 하는 중소기업에게 새로운 시도는 곧 리스크다. 그래서 “혁신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현장을 모르고 하는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스타트업 업계에는 ‘피봇(pivot)’이라는 말이 있다. 시장 변화에 맞춰 사업 방향을 수정하는 전략이다. 스타트업 교과서는 린스타트업, 즉 가벼운 창업을 권하고, 언제든 ‘가볍게’ 방향 전환하는 피봇 전략을 가르친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중소 제조기업들은 오래전부터 비슷한 선택을 이미 해 왔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중국의 추격과 공급망 변화 속에서 거래처를 바꾸고, 생산 품목을 조정하고, 생산 라인을 옮기며, 기존 기술을 새로운 시장에 연결해 왔다. 스타트업은 피봇을 이론으로 배우지만, 제조업은 생존을 위해 방향을 수정해왔다. 중소 제조업의 역사 자체가 피봇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지금 중소 제조업에 필요한 혁신은 거대한 변화보다는 작은 방향의 수정이다. 자동차 부품 회사가 로봇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들어 보거나, 이미 보유한 정밀 가공 기술을 반도체나 제조 AI 분야로 확장하는 식이다. 제조기업이 직접 소비재 브랜드를 만들거나, 기존 산업용 기술을 친환경·에너지 분야로 연결하는 시도도 가능하다. 회사를 버리고 새로 세우는 혁신이 아니라, 다른 방향을 조금 탐색해 보는 일이다.
경쟁력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제조기업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그 제조기업은 거친 현장의 파고 속에서 단련된 숙련 기술과 노하우, 공급망의 압력을 이겨낸 ‘날 것’의 경험데이터 같은 기반 역량을 축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제조기업이 축적한 역량이 미래 산업과 연결되도록 방향을 틔워주는 일이다. 정부의 지원이 새로운 연결과 전환을 위한 지원으로 이동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개별 지원이 어렵다면 여럿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해 지원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말이다.
우리 중소기업은 여러 위기를 경험해 왔다. 그리고 위기가 지난 이후의 시장 또한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지금 필요한 것은 90도나 180도의 급격한 방향 전환이 아니라, 미래 시장쪽으로 3도, 5도, 10도의 가볍고도 작은 항로 수정이다. 중소제조업은 사실 늘 그렇게 살아남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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