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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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부터 내 삶과 학문에 영향을 준 책들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 보려 한다. 다른 동물과 달리 사람은 태어나는 것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긴 시간 가르침을 받아 성장하는 것이며 그 강력한 도구가 책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잘 아는 바이다. 그렇기에 오늘의 나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간 내가 접해 온 책들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책에 대해 몇가지 등급을 매긴다. 그중 가장 높은 등급의 책이 성인들 말씀이 직접 담겼다는 이른바 경전(經典)들이다. 기독교의 성경이 그것이고 불가에서 말하는 불경이 그것이다. 그리고 유가에서는 사서삼경(논어, 맹자, 중용, 대학, 시경, 서경, 주역)을 그러한 책으로 인정하며, 일각에서는 노자나 장자의 저술에 대해서도 경전의 칭호를 부여한다. 이러한 책들이 경전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이 책들이 이미 많은 이들에게 삶의 기본 지침을 제시해 주는 책으로 선정되었음을 의미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이들 경전을 중심으로 각각의 강력한 문화 전통이 형성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은 이런 경전을 백지에서 출발해 읽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관련된 문화 전통에 깊이 젖어든 상태에서 접하게 된다. 경전은 이미 무조건 수용해야 할 ‘거룩한 가르침’이 되며, 이를 거스르는 것 자체가 불경한 짓으로 간주되기 일쑤이다. 심지어 그가 어느 문화 전통 속에 놓였느냐에 따라 특정 하나만을 ‘바른 가르침’으로 인식하고, 나머지는 모두 배제해야 할 대상이라는 자세마저 취하게 된다. 이럴 경우 그가 지향할 삶의 방향은 출발부터 타율적으로 굳어지는 셈이 되며,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끝내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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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우를 돌아보면, 나는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영향권 안에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성경이 내가 수용해야 할 ‘거룩한 가르침’의 지위를 지녔다. 이는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이를 받아들이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영생을 얻느냐 영벌을 받느냐를 판가름할 시금석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영남 집안들이 그랬듯이 우리 집안도 오랫동안 유교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태어날 무렵 우리 할머니가 기독교(개신교) 신자가 되면서부터 서서히 기독교 집안으로 바뀌어 갔다. 일찍이 도시에 나와서 살던 부모님과 나는 어떤 종교도 가지지 않고 지냈다. 그러다가 6·25 전쟁 뒤 몇년간 조부모님 댁에 가 있으면서, 나는 할머니 뜻에 따라 동네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기독교 문화에 잠시 접했을 뿐 주체적 신앙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고향을 떠난 후엔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벗어났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비로소 새로운 호기심에 끌려 교회를 다시 다니게 되었는데, 이때 비로소 성경을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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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다른 책들과는 달리 성경은 순수한 한글로 적혀 있어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는 있었으나, 그 뜻이 명료한 것은 아니었다. 고어체의 낡은 문장에 일상에서는 별로 쓰지 않는 표현들도 많아 뜻이 잘 통하지 않았고, 앞뒤 논리가 불명료하고 동문서답 같은 대화도 적지 않아 의미 파악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현대 영어로 된 영문판 성경을 구해 함께 읽어보니 그 의미가 훨씬 더 선명해졌다.(이때 처음으로 우리 말글보다 영어가 더 쉬울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내친김에 대학에서는 독일어본 성경을 읽었고, 훗날 일본어를 공부할 때는 일본어본 성경을 읽는 재미도 함께 누렸다. 이처럼 성경은 본의 아니게 유용한 외국어 학습 교본이 되기도 했다.)
문제는 성경에 적힌 내용을 내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특히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사고방식과 과학적 논리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 수두룩했는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내가 기독교 신앙을 지속하느냐 폐기하느냐 하는 문제이기에 이게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은 성경은 믿지 못할 책이라고 내던지고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이를 악물고 믿어보자고 하는 맹신의 길로 들어서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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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게는 다행히도 제3의 길이 보였다. 사실 거창하게 제3의 길이라 했지만 이거야말로 너무도 상식적인 것이어서 언급하기조차 민망할 정도인데, 이는 곧 성경은 사람이 쓴 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성경은 대략 2천년 혹은 그 이전의 시기에 당시 사람들이 파악한 세계관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본 하느님에 관해 적어놓은 책이다.(개신교에서는 ‘하느님’ 대신 굳이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초기에 ‘하늘’을 ‘하날’이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일부에서는 ‘하나’에서 유래한 유일신 개념이라 강변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내게 그리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가톨릭이나 신학자들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조차도 부담 없이 쓰고 있는 ‘하느님’으로 표기하려 한다.) 그러니 이 안에는 당연히 오늘의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 것이고, 오늘의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믿음의 조각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안에는 또한 그들의 종교적 성찰을 통해 찾아낸 삶의 지혜가 녹아 있을 것이고, 이를 다시 신화의 형태로 엮어낸 신앙의 정수가 담겨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이제야말로 성경을 바로 읽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내게 매우 큰 해방감을 주었다. 우선 기독교의 좁은 교조에 매일 필요가 없으며, 그렇기에 성경과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한층 더 깊이 들어갈 수가 있었다. 또 기독교 밖에 있는 다른 종교들의 경전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고, 이들을 통해 새로운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깨우침의 과정에서 나는 다른 스승과 문헌들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그중 두분을 꼽는다면, 함석헌 선생이 있고 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있다. 이런 분들이 가까이 있었고 또 내가 그들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게 된 것 또한 내게는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내가 대학생일 때 함석헌 선생의 강연에 간혹 참석하여 좋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그분의 글과 책을 통해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아인슈타인을 통해서는 내가 신(God) 곧 ‘하느님’ 개념을 버리지 않고도 과학을 할 수 있다는 것, 오히려 깊은 자연의 이해를 통해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함께 내가 부수적으로 읽어 도움을 얻은 책들로는 신학자 파울 틸리히와 루돌프 불트만의 저작들이 있고, 또 일찍이 읽은 책들로 영국 생물학자 줄리언 헉슬리의 ‘계시 없는 종교’(Religion without Revelation)와 미국 신학자 랠프 버호의 ‘과학적 신학의 지향’(Toward a Scientific Theology) 등이 큰 도움을 주었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흥미로운 사실은 근대 과학의 확고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대표적 지성인 아이작 뉴턴이 사실은 기독교 성서에 대해 무조건적 신앙을 지녔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긴 생애를 통해 과학에 관한 저술 못지않게 많은 분량의 신학·성경 관련 글들을 남겼음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는 특히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예언과 종말론에 심취했으며, 심지어 종말의 시기와 사건을 수치로 계산해 내려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뉴턴과 같은 합리적 지성인조차도 이른바 경전에 대한 맹목적 신앙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 주는 좋은 사례에 해당한다. 지금도 좋은 업적을 낸 많은 과학자들이 유독 경전에 접하면 이성이 마비되는 이상한 증상들을 보이는데, 이는 통합적 지성의 마련이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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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
|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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