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영 시니어 입장가] (60)
12년 투병 끝에 소집된 가족의 24시간
유산 기부와 인공호흡기 제거 폭탄선언
똥 내 나는 침대서 비로소 마주한 진심
자기 결정권과 생명 보호 사이의 갈림길
룰라바이는 자장가라는 뜻이다. 앤드류 레비타스 감독이 만든 이 영화에서는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아버지(리차드 젠킨스 분)에게 아들 조나단(가렛 헤드룬드 분)이 침대 옆에서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자장가를 불러준다. 죽음은 어쩌면 잠이 드는 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죽음을 앞두고는 가족이 다 모인다. 영화 포스터 /TMDB
백만장자인 아버지는 12년간 투병 생활을 한 끝에 가족을 소집했다. 아들은 집을 나와 음악을 하며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자유인이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여동생은 반대로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자라 변호사로 성공했다. 병상 옆에는 아내가 간호를 맡고 있다.
그렇게 가족이 다 모인 가운데 아버지는 다음 날 오전 8시에 인공호흡기를 뽑고 생을 마감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살던 집은 아내에게 주고 나머지 유산은 사회단체에 기부했다고 유산 분배에 대해서도 선언한다.
상당히 무거운 주제이지만 영화는 그리 무겁지 않게 이어진다. 우리는 대부분 준비 없이 이별을 맞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정작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은 남아 있는 가족들이다. 만약 마지막 날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다.
아버지의 일방적인 선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산 배분 문제도 있고 인간적으로 존엄사를 순순히 받아들일 자식들은 없다. 아들은 살기도 바쁜데 오라고 했다고 투정을 부리며 억지로 갔다. 그러나 가 보고 아들은 방황한다.
아버지와 따뜻한 관계에서 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병약해져서 침대에서 대변을 쏟아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들에게 간호사는 침대에 같이 누워주면 환자가 더 좋아할 것이라고 권고한다.
처음엔 대변이 묻어 더러운 침대에 어떻게 눕느냐고 항변했지만 결국 아버지 옆에 스스로 눕는다. 그리고 똥 내 나는 침대에 같이 누워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똥이 더럽다는 개념도 체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똥 냄새와 똥이 묻는 것을 너무나도 현실적인 문제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침대에 같이 누운 장면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아버지와 한 침대에 누운 기억이 대부분의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은 시간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 그 시간 속에서 가족들은 완벽하게 화해는 못하더라도 조금 더 솔직해진다. 특히 아들은 처음에는 가장 무덤덤했으나 점차 흔들리는 감정선을 잘 표현했다.
영화의 속도는 느리다. 침구와 시선·멈칫하는 대사 사이의 여백을 잘 살렸다. 장면은 크지 않고 대사도 별로 없다. 그러나 그 정적인 호흡 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경험을 끼워 넣게 된다. 언젠가 하지 못했던 말들·미뤄둔 전화 한 통 등 개인적인 기억을 건드린다. “있을 때 잘해”라는 우리 가요가 와닿는 부분이다.
더 이상 살 희망이 없다면 존엄사도 떠오를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 /유튜브 화면 캡처
존엄사는 베네룩스 3국이 2000년대 들어 합법화했고 다른 유럽·북미 일부에서는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여 제한적으로 합법화가 확대되는 추세다. 반면 아시아 다수 국가는 생명 보호 원칙·의료 윤리·종교 영향 등으로 신중한 입장이다.
존엄사는 죽을 권리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를 국가와 사회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법·문화의 종합적 선택이다. 그러나 고통은 심하고 회복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경우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자기 판단이 선다면 우리도 존엄사는 생각해 볼 만한 과제다.
☞존엄사=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에 접어든 환자가 본인의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로 생명 연장 치료를 중단하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안락사와 혼용되기도 하지만 대개 인공호흡기 제거 등 소극적 의미의 중단을 의미한다.
여성경제신문 강신영 댄스 칼럼니스트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