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 AFP연합뉴스
미국이 이례적으로 ‘엔저 저지’를 위해 대규모 엔화 매수에 나선 것은 엔저가 일본 경제는 물론 미국 국채시장, 나아가 글로벌 금융시장까지 흔들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헤지펀드 출신으로 글로벌 외환시장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는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엔화의 구조적 약세가 장기화될 가능성을 우려한 것도 공조를 이끈 요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국 개입에 따라 엔화 가치가 인위적으로 급등하면서 2024년 글로벌 증시를 뒤흔들었던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 충격’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최근 미일 통화 당국의 엔화 방어 움직임은 숨 가쁘게 이어졌다. 지난달 29일 엔·달러 환율이 장중 달러당 163.9엔대까지 치솟아 엔화 가치가 1986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추락하면서다.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30일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들이는 시장 개입에 나섰고 미 재무부도 뉴욕연방준비은행을 통해 복수의 은행에 레이트 체크(rate check)를 실시하며 투기적 엔화 매도세를 압박했다. 레이트 체크는 당국이 외환 거래 은행에 현재 환율을 문의하는 절차로 시장에서는 직접 개입에 앞선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일본 당국은 지난달 31일에도 추가 개입을 단행했다. 이후 뉴욕연은도 미 재무부를 대신해 유로화를 팔고 엔화를 사들이면서 엔·달러 환율은 157엔대 초반으로 내려앉았다.
0316A05 미일시장개입엔달러환율
일본 언론들은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이 지난달 30일 투입한 개입 자금만 6조~7조 엔(약 55조~64조 원)에 달한 것으로 추산한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실제 개입 규모가 약 8조 4500억 엔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미국 역시 최대 100억 달러(약 1조 5700억 엔) 규모의 엔화 매수를 검토한 정황이 포착됐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31일 베선트 장관이 캠프데이비드 각료회의에서 사용한 메모장에는 ‘엔화 50억~100억 달러 매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처럼 미국과 일본이 시장에서 엔화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함께 움직인 것은 1998년 이후 처음이다. 당시 미 재무부는 엔화 가치가 8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자 일본 경제의 침체를 막기 위해 엔화를 직접 사들였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직후 주요 7개국(G7)이 공동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했지만 당시에는 엔화 강세를 완화하기 위해 엔화를 매도했다.
미국이 이례적으로 움직인 배경에는 엔화 추락이 일본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오랜 저금리 환경에서 연기금 등 일본 기관투자가들은 미국 국채를 비롯한 해외 자산 투자를 대폭 늘려왔다. 하지만 일본 금리가 오르는 가운데 엔화 약세까지 심화하면 환차손을 감수하면서 미국 국채를 보유할 유인이 줄어 매도 가능성이 커진다.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를 대거 처분할 가능성도 미국에는 부담이다. 막대한 재정적자와 장기금리 상승 압력에 직면한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국채 매도를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엔화 방어에 힘을 보탤 유인이 컸다는 해석이 나온다.
엔저가 일본의 대미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점도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대목으로 꼽힌다. 엔화 가치 하락이 장기화하면 일본산 자동차와 기계류 등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게 된다.
베선트 장관이 엔화의 취약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는 점도 이번 행보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조지 소로스가 이끌던 헤지펀드에서 근무하던 2013년 엔화 약세에 베팅해 10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는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정부의 확장 재정 정책이 일본 국채 금리 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다카이치 정부 측에 비공개로 전달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전했다. 그러면서 2022년 취임 직후 450억 파운드에 달하는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해 국채 금리 급등으로 이어진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 사례가 재연될까 경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장은 향후 양국의 추가 조치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로서는 양국이 3일 다시 시장에 뛰어들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닛케이는 “도쿄 외환시장에서는 3일 새벽부터 비상 대응에 들어갈 태세”라면서 “엔·달러 환율이 155엔대로 접어들지 여부가 관건”이라고 짚었다.
일각에서는 급격한 엔화 변동이 엔캐리 트레이드 포지션 청산을 촉발할 수 있다는 경계감도 나온다. 엔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미국 주식과 채권 등 기대수익률이 높은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이다. 최근 엔화 가치가 급등하면서 엔화 매도·달러 매수 포지션을 쌓아온 투기 세력들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한꺼번에 청산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번 개입이 엔화 강세를 장기간 이어가게 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미일 금리 차와 일본의 재정적자처럼 통화가치의 방향을 결정하는 근본 요인을 바꾸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의 정책금리는 1%로 미국 기준금리 상단인 3.75%보다 여전히 크게 낮다. 일본은행이 9월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지만 긴축 속도를 더욱 높이지 않는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에버코어ISI는 “금리 차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외환시장 개입 효과는 비교적 단기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