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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ON 선데이] 한국 오페라여 새 활로를 찾아라

세계 최정상 오페라단도 재정난 “테크 기업 후원받아야” 주장도 젠슨 황, 멀티미디어 오페라 후원 우리도 기업 설득할 실력 갖춰야 그런데 베리의 처방이 눈길을 끈다. 테크 기업 재벌들을 새로운 후원자로...

[ON 선데이] 한국 오페라여 새 활로를 찾아라

정재왈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

“오페라는 새로운 재벌들이 필요하다.” 이번 주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면에 실린 도발적인 칼럼의 제목이다. 영국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의 전 예술감독 존 베리가 쓴 글이다.

글은 뼈아픈 현실에서 출발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메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간에 추진되던 2억 달러 규모의 협상이 최근 결렬됐다. 세계 최정상의 오페라단조차 티켓 수입 감소와 노조 갈등, 기존 기부자 계층의 쇠퇴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세계 최정상 오페라단도 재정난

“테크 기업 후원받아야” 주장도

젠슨 황, 멀티미디어 오페라 후원

우리도 기업 설득할 실력 갖춰야

그런데 베리의 처방이 눈길을 끈다. 테크 기업 재벌들을 새로운 후원자로 끌어들이라는 주장이다. 최근 제프 베이조스가 회화 한 점에 5250만 달러를 썼고, 엔비디아 CEO 젠슨 황 부부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 연간 500만 달러를 3년간 약속했다. 테크 기업의 거물들이 예술에 눈길을 주는 이때 오페라가 이를 적극 활용하라는 것이다.

베리는 오페라가 400년 동안 음악·연극·무용·디자인을 결합하며 사회를 뒤흔들어 온 ‘태생적 파괴자’라고 역설한다. 이는 실리콘밸리가 숭배하는 혁신의 언어와 닮았다. 재작년 리바이벌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카바레’처럼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젠슨 황의 후원으로 탄생한 멀티미디어 오페라 ‘손오공(The Monkey King)’처럼 형식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저명한 클래식 음악 전문 매체 ‘슬립드 디스크’의 노먼 레브레이트는 이 칼럼을 긍정적으로 소개했지만, 독자들 사이에서는 “테크 억만장자들은 무형의 공연예술에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회의론도 나왔다. 이 베리의 칼럼을 읽으며 나는 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메트의 위기가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한국 오페라의 수치는 나쁘지 않다. 2025년 국내 공연 시장은 티켓 예매 2478만 매, 판매액 1조7326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조수미·연광철, 사무엘 윤 같은 세계적 성악가들이 국제 무대를 누비고, 콩쿠르 수상 소식은 이제 특별한 뉴스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몹시 다르다. 국립오페라단 이외의 민간 오페라단들은 국가 지원에서 사실상 소외된 채 성악가 개인의 열정과 사비에 의존해 제작비를 충당하는 관행이 이어진다. 기업 후원은 산발적이고 일회적이다. 관객층은 중장년층에 편중되어 있다. 세계 수준의 인재를 가졌지만, 그 인재를 지속적으로 품어낼 그릇은 전반적으로 빈약하다.

그럼 한국 오페라에 새 활로는 없는 것일까. 먼저 재원 구조가 다변화되어야 한다. 한국 오페라의 재정은 오랫동안 정부 보조금과 티켓 수입이라는 두 축에 크게 의존해 왔다. 기업과 개인의 민간 후원이 뿌리내리도록 문화예술 기부에 대한 혜택이 필요하고, 오페라 후원의 효과가 스포츠나 대중문화 후원에 뒤지지 않는다는 인식도 요구된다.

또한 오페라단 스스로도 기업 파트너를 설득하는 언어와 데이터를 갖추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예술 참여가 정서적 안정과 건강에 기여한다는 연구 결과나, 공연예술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처럼 측정 가능한 사회적 가치를 차분히 제시하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다음으로, 한국 성악가들이 세계 무대에서 쌓아온 명성을 오페라계 전체의 자산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K팝과 K드라마가 세계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이 시대에, 한국 오페라는 여전히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소프트파워의 한 축이다. 삼성·현대· LG·카카오 같은 기업들이 이미 문화 마케팅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만큼, 오페라가 ‘고리타분한 예술’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품격 있는 문화 플랫폼으로 인식되도록 접점을 넓혀가는 노력이 절실하다.

마지막으로, 형식의 다양화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 국내에서도 소극장 오페라나 콘서트 오페라 등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는 기획자들이 있다. 그러나 제도권의 관심은 여전히 전막 정통 레퍼토리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도시 공간을 무대로 한 야외 오페라나 AI 등 첨단 기술을 접목한 실험적 형식에도 자원이 배분된다면 새로운 관객과 만나는 통로가 조금씩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젠슨 황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 지갑을 연 것은, 오페라가 그의 언어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기술로 가능해진 새로운 감각적 경험, 데이터로 뒷받침된 사회적 가치, 그리고 후원자를 단순한 재원이 아닌 ‘문화의 공동 창조자’로 바라보는 시선이 그 바탕에 있었다. 한국 오페라도 새 활로를 찾아 그런 대화를 적극적으로 시작할 때가 아닌가 한다.

정재왈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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