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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NGO 현장]나를 갖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

첫 번째 대통령 탄핵을 이뤄낸 촛불집회는 10년 전 이맘때 시작됐다. 그땐 ‘박정희 체제’나 신자유주의 같은 거대한 것들이 곧 무너진다고 했다. 1987년 체제나 제왕적 대통령제 같은 낡은 것들의 시효도 곧 끝난다고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지만, 불행히도 모두 견고하다.

[NGO 현장]나를 갖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

첫 번째 대통령 탄핵을 이뤄낸 촛불집회는 10년 전 이맘때 시작됐다. 그땐 ‘박정희 체제’나 신자유주의 같은 거대한 것들이 곧 무너진다고 했다. 1987년 체제나 제왕적 대통령제 같은 낡은 것들의 시효도 곧 끝난다고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지만, 불행히도 모두 견고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 동안 우리가 사는 ‘헬조선’은 ‘춘추정병시대’(경향신문 창간 80주년 특집)를 맞이했다. 촛불 10년의 성적표가 아닐까.

춘추정병시대라는 진단은 불안을 지목한다. 불안은 공포다. 공포는 희망이 부재한 자리 즉, 답을 상상하거나 떠올리길 실패했을 때 나타난다. 공포는 공백에서 오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춘추정병시대를 비롯해 최근 언급되는 불안은 ‘나 자체의 공백’에서 비롯된다.

‘바깥으로부터 주어지는 나’ 같은 건 이제 없다. 우리는 국민국가나 민족, 계급이 요구하던 획일화된 상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노동자가 신분 질서에서 벗어나자마자 생산수단과 자본에 예속됐듯, 낡은 질서의 해체가 해방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각종 전통적인 정체성의 해체는 자유보다는 망망대해에 내던져지는 것에 가깝다.

이졸데 카림은 이를 ‘3세대 개인주의’를 통해 설명한다. 전통적 집단(학교, 정당, 교회)의 일부로 통합됐던 1세대 개인주의, 자기 자신의 고유함과 진정성을 중시하며 정체성 정치에 결부된 2세대 개인주의와 달리 3세대 개인주의는 ‘정상성’이라는 준거 자체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고, 온전하며, 당연한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그들에겐 ‘모두가 공유하는 세계관’이나 ‘공동의 약속’도 없다.

조은주는 <세계에 속한다는 것>에서 학교에 내재한 ‘속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거듭 강조한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건 그 자체로 인정된다는 걸 의미한다. 대학 졸업을 유예하는 건 취업에 유리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어디엔가 속한다는 느낌은 희소해졌다. 소속됨으로 얻는 정체성과 존엄은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우회적이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거쳐 발견되고 획득되어야 하는 과제이자 목표”다. 불행하게도 “현대인은 거의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매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사라진 ‘공동의 약속’은 ‘개인의 꿈’이 대신한다. 병영·학교 모델에 기반한 획일적인 지식교육에서 흥미와 끼를 존중하는 개별화 교육으로의 변화는 진보적인 것으로 이해돼왔다. 하지만 그것은 능력주의와 ‘선택의 자유’를 기반으로 ‘자아실현의 내러티브’ 완성을 요구한다. 각각은 개인의 몫으로 주어진 자기실현의 명령을 충족하기 위해서 강박적인 자기관리 전략을 실천할 수밖에 없다. 자유학기제, 고교학점제가 대표적이다. 모든 것이 가능한 만큼 모든 실패의 책임도 내 몫이다. 체벌같이 신체에 직접 가해지던 권력으로 통제되던 학교는 학생 스스로 통제하도록 작동방식을 바꾸었다. 이와 같은 교육모델이 ‘진보’ 정부에 의해 추동된 것은 징후적이다.

망망대해에 던져진 이들은 필연적으로 자기 찾기에 몰두하고, 뿌리 없는 이들은 불안을 홀로 떠안는다. 섣불리 내놓을 대안은 없다. 그렇다고 관전하듯 한숨과 냉소로 대할 생각도 없다. 진보를 말하는 이들이 현실을 뼈아프게 직시했으면 한다. 어설픈 낙관보다 고스란히 파편을 맞고 있는 이들의 고통 곁에 서길 바란다.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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