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와 픽사로 대표되는 글로벌 애니메이션 시장은 한국 콘텐츠에게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K-콘텐츠가 영토를 넓혔지만, 캐릭터 IP의 본진인 애니메이션만큼은 일본 지브리와 토에이의 그림자가 짙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벅스 버니와 톰과 제리를 만들어온 워너의 애니메이션 라인에 한국 웹툰이 올라타며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중이다. 한국의 어느 오래된 골목길 만화방에서 시작된 찰라의 재미가 PC와 모바일을 넘어 기어이 세계로 질주한다.
웹툰 엔터테인먼트는 현지 시각 13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웹 서밋 밴쿠버 2026'에서 워너 브러더스 애니메이션(WBA)과 공동 개발하는 신규 애니메이션 라인업 4편을 추가 공개했다고 15일 밝혔다. 지난해 11월 양사가 체결한 전략적 파트너십에서 처음 발표된 작품들에 4편이 더해지면서 공동 제작 프로젝트는 총 10편 규모로 확정됐다.
웹툰 엔터테인먼트와 WBA가 공동 개발하는 신규 애니메이션 라인업 4종이미지. 사진=회사제공
네이버웹툰이 워너 브러더스 애니메이션과의 공동 제작 라인업을 완편하면서 한국 공모전 출신 신인 작가의 작품까지 함께 묶어 올린 것이다. 플랫폼이 신인 발굴부터 할리우드 메이저 영상화까지 한 줄로 잇는 수직 컨베이어 벨트를 실제로 돌리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적지 않다.
새로 합류한 작품은 한국 작품 '늑대와 빨간모자'를 비롯해 '뱀파이어 가족', '세이블의 저주', '스노우 앤 브라이어' 등 4편이다. 1차로 공개됐던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열렙전사', '다운 투 어스', '엘프 & 워리어' 등이 함께 WBA 제작 파이프라인에 본격 편입됐다. 한국 오리지널과 영어 오리지널이 절반씩 섞여 있고 장르도 로맨스와 판타지, 액션을 아우른다.
워너의 진심도 드러났다. 당장 이번 발표는 데이비드 J. 리 웹툰 엔터테인먼트 CFO와 샘 레지스터 WBA 사장이 공동 세션 형식으로 직접 진행했다.
레지스터 사장은 워너 브러더스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카툰 네트워크 스튜디오와 해나-바베라 스튜디오 유럽까지 총괄하는 인물이다. 사장급이 공개 행사에 직접 나선 것은 웹툰 IP를 단발 라이선싱이 아니라 장기 콘텐츠 자산으로 다루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레지스터 사장은 "항상 차세대 벅스 버니나 차세대 배트맨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캐릭터를 찾고 있다"며 "스토리와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기계이자 엔진과도 같은 웹툰의 역량에 큰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90년 가까이 캐릭터 IP를 우려내온 할리우드 노포가 '캐릭터 공장'으로서 웹툰을 호명한 셈이다.
캐나다에서 열린 ‘웹 서밋 밴쿠버 2026(Web Summit Vancouver 2026)’ 발표 현장. 사진=회사제공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한국 작품 '늑대와 빨간모자'의 합류다.
보름달이 뜨면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고등학생 안나의 이야기를 그린 판타지물로 작가 슈안의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네이버웹툰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운영하는 신인 발굴 프로그램 '네이버웹툰 최강자전'의 2017년 우승작이다. 2018년 정식 연재에 들어간 뒤 영어와 스페인어, 일본어 등 6개 언어로 서비스되며 글로벌 독자층을 쌓아왔다.
공모전에서 트로피를 받은 신인의 첫 작품이 9년 만에 워너의 애니메이션 라인에 올랐다는 점에서 한국 콘텐츠 산업 전체로 봐도 흔치 않은 경로다.
작가 슈안은 "플랫폼이 글로벌 독자와의 연결뿐 아니라 IP 확장까지 함께 고민해준 덕분에 개인 작가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WBA 애니메이션화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며 "창작자 입장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는 강한 동기부여가 된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파트너십의 출발점은 지난해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양사는 글로벌 배급을 목표로 웹툰 기반 애니메이션 10편을 공동 제작한다는 큰 그림을 공개했다.
사진=회사제공
한국어와 영어 플랫폼에서 연재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며 웹툰 엔터테인먼트의 글로벌 IP 비즈니스 조직인 웹툰 프로덕션과 일본 IP 사업팀이 함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구조다. 김용수 네이버웹툰 최고전략책임자는 당시 "젠지(Gen Z) 세대가 사랑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창작자들의 작품을 가장 존경받는 애니메이션 회사 중 하나와 함께 풀어볼 기회"라며 기대를 드러낸 바 있다. 6개월 만에 그 구상이 라인업 10편 체제로 완성된 모양새다.
한편 웹툰 엔터테인먼트의 할리우드 행보는 애니메이션 한 채널에 머물지 않는다. 최근 디즈니, 프라임 비디오 등 메이저 스튜디오와의 파트너십을 잇따라 공개했고, 라이언 포지 엔터테인먼트와는 영어 오리지널 웹툰 '슛어라운드'의 실사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애니메이션과 OTT 시리즈, 실사 영화로 영상화 채널을 분산하면서 IP 한 편당 다층 수익화 구조를 만들어가는 셈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라인업 완편을 K-IP 글로벌화의 질적 전환점으로 본다.
그동안 한국 웹툰의 해외 영상화는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이나 한국 드라마화 중심으로 진행됐고, 할리우드 메이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의 직접 공동 제작은 사실상 빈자리였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일본 픽코마를 축으로 일본 시장 공략에 무게를 두는 사이, 네이버웹툰은 미국 본사 체제 전환과 나스닥 상장까지 마치며 할리우드 진입로를 선제적으로 닦아왔다. 이번 WBA 라인업은 그 사전 작업이 실제 결실로 가시화되는 첫 신호에 가깝다.
특히 공모전 우승작이 글로벌 메이저 스튜디오의 제작 라인업에 오른 사례는 플랫폼 비즈니스의 작동 원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발굴-연재-번역-글로벌 유통-영상화로 이어지는 IP 가치사슬을 한 사업자가 일관되게 운영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입증한 셈이다. 10편의 WBA 라인업이 실제 방영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한국 웹툰 IP의 글로벌 인지도는 또 한 차례 도약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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