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타임즈뉴스 = 최남주 기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SK하이닉스를 바라보는 시장의 시선은 비교적 단순했다. 삼성전자와 같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지만 체급 차이는 분명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실적도, 시가총액도, 시장 영향력도 삼성전자 쪽으로 무게가 쏠렸다. 재계에서는 “반도체 시장 흐름은 결국 삼성전자가 만든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했다.
하지만 지금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엔비디아 AI 서버 핵심 메모리 공급망 중심에는 SK하이닉스가 서 있다. 한때 ‘추격자’로 불리던 회사는 이제 AI 메모리 시장 흐름을 먼저 읽고 방향을 제시하는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 변화 중심에는 연구실과 생산라인을 30년 넘게 오가며 반도체 공정을 다뤄온 엔지니어 출신 CEO가 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다.
최근 곽 사장은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 상징적인 기록 하나를 새로 썼다. 오랫동안 삼성전자 임원들이 사실상 독점해온 비오너 출신 주식재산 1위 자리에 처음으로 SK하이닉스 임원이 이름을 올린 것이다. 시장이 더 주목한 건 숫자 자체보다 그 상징성이었다. AI 시대를 거치며 한국 반도체 산업의 중심축이 실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흐름이 시장 가치로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 이유다.
기업분석전문 한국CXO연구소에 따르면 이달 13일 기준 곽 사장의 주식평가액은 282억8051만 원이다. 삼성전자 노태문 사장의 279억 원보다 많다. 곽 사장이 보유한 SK하이닉스 주식은 1만4312주다. 지난해 10월만 해도 그의 주식평가액은 29억 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AI 메모리 기대감과 함께 SK하이닉스 주가가 급등하면서 반년도 지나지 않아 자산 규모는 250억 원 넘게 불어났다. 상승률만 861%에 달한다.
한국CXO연구소 오일선 소장은 “SK하이닉스 임원이 삼성전자 출신보다 주식평가액을 앞지른 것은 SK하이닉스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주식시장에서 성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이 숫자를 단순한 주가 상승 효과로만 보지 않는다. 적자와 불황에 흔들리던 회사를 AI 메모리 시장 핵심 기업으로 바꿔놓은 경영 전략과 실행력이 결국 시장 평가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더 많다. 실제 SK하이닉스는 최근 HBM 시장에서 사실상 글로벌 표준에 가까운 위치를 확보하며 AI 시대 핵심 공급망 기업으로 올라섰다.
재계에서는 곽 사장을 두고 ‘하이닉스 해결사’, ‘HBM 승부사’, ‘반도체 마술사’라는 표현까지 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AI와 반도체를 그룹 미래 사업 중심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곽 사장이 핵심 실행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이다. 최태원 회장이 방향과 투자 전략을 제시했다면, 곽 사장은 이를 실제 제품 경쟁력과 실적으로 연결한 현장 지휘관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곽 사장은 화려한 스타 CEO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다. 공개 석상에서도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차분하게 핵심만 이야기하는 편이다. 대신 현장에서는 누구보다 집요하다는 평가가 많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보고서보다 공정을 먼저 보는 CEO”라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그는 주요 생산라인 수율 변화와 공정 안정화 흐름을 직접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생산 현장에서 올라오는 작은 변수 하나도 쉽게 넘기지 않는 스타일이라는 얘기다.
1965년생인 곽 사장은 고려대 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이후 1994년 현대전자에 입사하며 반도체 업계에 발을 들였다. 연구개발(R&D)과 생산, 제조기술, 공정관리 부문을 두루 거쳤고 미래기술연구원, 청주FAB담당, 제조·기술담당, 안전개발제조총괄 등을 맡았다. 30년 넘게 한 회사에서 성장한 정통 ‘하이닉스맨’이다.
곽 사장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건 메모리 업황이 급격히 꺾인 2022년 이후다. 반도체 가격은 빠르게 떨어졌고 재고 부담은 커졌다. 시장에서는 “메모리 겨울이 시작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삼성전자와 마이크론 등 글로벌 업체들도 투자 조정과 감산에 들어갔다. SK하이닉스 역시 대규모 영업손실을 냈다. 당시 업계 분위기는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할 만큼 무거웠다.
하지만 곽 사장은 불황기에 방향을 틀지 않았다. 저수익 제품 비중은 줄이고 HBM과 DDR5 같은 고부가 메모리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재편했다. 감산과 비용 조정으로 손실을 줄이는 동시에 미래 기술 투자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내부에서는 투자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곽 사장은 AI 시대가 열리면 결국 HBM 경쟁력이 시장 판도를 바꿀 것이라고 판단했다.
승부수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위력을 드러냈다. 챗GPT 등장 이후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AI 서버 투자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HBM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곽 사장은 엔비디아 공급망을 중심으로 HBM 시장 선점에 집중했고 SK하이닉스는 HBM3와 HBM3E 핵심 공급사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에서도 삼성전자를 넘어섰다는 조사 결과까지 나오며 시장 분위기를 뒤집었다. 과거 삼성전자를 따라가던 회사가 이제는 AI 메모리 시장 흐름을 먼저 읽고 움직이는 기업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다.
실적도 빠르게 달라졌다. 곽 사장이 이끄는 SK하이닉스는 AI 메모리 수요 확대에 힘입어 상반기 영업이익을 전년보다 7조 원 이상 끌어올렸다. 시가총액도 창사 이후 처음으로 200조 원을 넘어섰다. 과거 CES 현장에서 곽 사장이 언급했던 ‘시총 200조 원’ 목표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현실이 된 셈이다.
곽 사장의 현장경영 보폭도 더 넓어지고 있다. 그는 CES 현장에서 직접 엔비디아와 AMD, 글로벌 빅테크 관계자들을 만나 AI 메모리 협력을 논의했다. 최태원 회장과 함께 대만을 찾아 TSMC와 협력 강화에도 나섰다. 차세대 HBM4 시장에서는 메모리 기술뿐 아니라 패키징과 공급망 경쟁력이 중요해지는 만큼 글로벌 동맹 구축이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 내부 소통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곽 사장은 최근 사내 행사에서 과거 하이닉스 광고 문구였던 ‘오래 가고 좋은 회사’를 다시 꺼냈다. 실적 개선과 성과급 기대 속에서 조직을 하나로 묶는 것 역시 CEO 역할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물론 곽 사장 앞에는 풀어야 할 숙제도 남아 있다. 삼성전자는 HBM 시장 반격에 속도를 내고 있고 마이크론 역시 차세대 제품 경쟁을 강화하고 있다. HBM4부터는 메모리 기술뿐 아니라 로직 다이와 첨단 패키징 경쟁까지 본격화될 전망이다. AI 투자 사이클 둔화 가능성 역시 변수다.
그럼에도 업계에서는 곽 사장의 가장 큰 강점으로 ‘위기 대응 능력’을 꼽는다. 그는 메모리 불황기에는 손실을 최소화했고, 회복기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AI 메모리 시장을 선점했다. 화려한 언변보다 현장과 숫자로 결과를 증명해온 엔지니어형 CEO라는 점도 강점으로 거론된다.
삼성전자 뒤를 좇던 SK하이닉스의 엔지니어는 이제 한국 AI 반도체 산업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시장은 더 이상 SK하이닉스를 ‘뒤따라가는 회사’로 보지 않는다. SK하이닉스의 이같은 변화 중심에는 비오너 출신 주식부자 1위에 오른 곽노정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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