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렇게 된다’에서 ‘왜 그럴까’로
AI와 함께하는 삶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오늘은 또 어떤 것을 AI와 함께할까 고민한다. 생성형 AI 이미지
요즘은 지자체마다 다양한 문화·교양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도서관이나 복지관 에서도 여러 강좌가 열린다. 취미와 인문학을 넘어 AI와 컴퓨터를 다루는 교육 도 적지 않다. 얼마 전 나는 책과 차를 주제로 한 강좌를 들었다. 그곳에서 만 난 한 분은 글쓰기를 좋아해 문예지에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지금은 자신을 돌보느라 글쓰기를 잠시 쉬고 있지만, 여러 강좌를 찾아다니며 배움을 이어가 고 있다.
그 무렵 온라인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의 작가 공모전에 자전적 에세이를 출품했다. 글을 보내기 전에 지인들에게 초고를 보냈다. 글쓰기 경험이 있는 그분에게도 보냈다.
그분이 내 글을 읽고 감상을 보내왔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벅찬데 글로 풀어냈다는 말이었다. 격려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데 귀가 얇은 나는 더 신이 났다. 이어진 메시지에는 근황도 담겨 있었다. 요즘 AI 교육에 빠져 동영상을 만들고 블로그를 꾸미는 법을 배운다고 했다.
처음에 AI와 대화할 때는 어떻게 부탁해야 할지 몰라 막연한 질문만 던졌단다. 지금은 필요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찾아달라고 하고, 요리의 순서가 달라지면 왜 맛이 달라지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해달라고도 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그냥 그렇게 된다.’에서 ‘이런 반응을 일으켜서 된다.’라고 이해되니 제 삶이 윤택해지고 있어요.”
그분이 말한 윤택함은 새 조리법을 많이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늘 하던 일의 이유를 알아가는 즐거움이었다. 어릴 적 부엌에서 본 나물무치기도 그랬다. 소금은 늘 맨 나중이었다. 나는 그 까닭을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소금을 일찍 넣으면 삼투압 때문에 채소 속 물이 빠져나온다. 나물은 숨이 죽고 접시 바닥에는 물이 고인다. 찌개에 넣을 마늘 을 기름에 먼저 볶는 데도 이유가 있다. 마늘의 향 성분이 기름에 우러나 국물에 풍미를 더한다. 손에 익은 순서 속에 과학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차를 우리는 일도 다르지 않다. 강좌에서 강사는 끓인 물을 한 김 식힌 뒤에야 찻잎 위에 부었다. 녹차는 팔팔 끓는 물로 우리지 않는다고 했다. 왜 그런지 궁금해 AI에게 물었다. 떫은맛을 내는 카테킨은 뜨거운 물에서 더 많이 우러나고, 감칠맛을 내는 테아닌은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도 우러난다고 한다. 그래서 녹차는 대체로 70~80도 정도의 물에서 부드러운 맛을 내기 쉽다. 이유를 알고 나니 온도를 조금씩 바꾸어 우려보고 싶어졌다. 방법을 따라 하다가 이유를 묻기 시작하면, 배운 것을 생활에서 시험해볼 여지가 생긴다.
질문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 쉬운 것을 묻는 듯해 강의실에서 손을 들지 못하고, 자녀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묻다가 미안해 입을 다문다. AI에게는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그 말이 무슨 뜻이야?” “내 생활에서 예를 들어줘.” 몇 번이고 되물어도 된다. 답이 빗나가면 조건을 고쳐 다시 묻는다. 그분도 짧은 물음에서 출발해 자기 생활에 맞는 질문을 찾아가고 있었다.
평상시 당연하게 여기던 일들
왜 그런지 AI에 계속 물어봐
전공분야 아니면 몰랐을 사실들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 열려
나는 격주로 대구신문에 AI 칼럼을 쓴다. 이번 글은 그분을 모티브로 썼다. 그래서 칼럼 초안을 보내고 의견을 부탁했다. 돌아온 답장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50대 중반, 사회와 단절된 경력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AI는 세상이 변하는 모습을 배우는 작은 창이었다고 했다. 모르는 것을 묻고 곧바로 답을 얻으면서, 그 나이 먹도록 무엇을 했느냐는 개인적·사회적 시선의 잣대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공이 아니면 몰랐을 분야를 가볍게 상식으로 접할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는 말도 덧붙였다.
“AI에게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저의 뇌에게 ‘사고’를 하게 만들거든요.”
질문을 만들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경험이었다. 나 역시 강의자료를 준비하며 이런 대화를 한다. 외국인 유학생에게 글로벌 비즈니스를 가르치다 보면 개념을 번역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어 설명에 영어를 나란히 붙이고, 추상적인 설명이 돌아오면 작은 가게나 시장의 예를 들어달라고 한다. 학생에게 익숙한 생활과 이론이 만나는 지점을 찾으려는 것이다. 네팔 학생에게는 산비탈의 차밭이, 우즈베키스탄 학생에게는 목화밭이 교과서보다 나은 교재가 된다.
국제무역이론의 ‘비교우위’도 마찬가지다. 어떤 나라가 모든 물건을 더 잘 만들더라도 다른 나라와 무역하는 편이 유리할 수 있다는 설명은 처음 듣는 학생에게 쉽게 와닿지 않는다. AI에게 생산비를 비교하는 사례를 만들어달라고 한 뒤 학생들에게 익숙한 상품으로 바꾸고 숫자를 줄였다. 누가 더 잘 만드느냐보다 무엇을 상대적으로 덜 포기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서였다. AI가 제시한 계산은 직접 확인하고 설명의 순서도 고쳐 잡았다.
그림을 그릴 때도 질문한다. 공모전 작품에 실을 경남 합천의 ‘연호사’라는 절을 그리고 싶었는데, 복잡한 누각 사진을 보고 당황했다. 어디서 선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사진을 건네며 단순한 펜화로 바꾸어달라고 부탁했다. 처음 나온 그림은 너무 반듯하고 색이 짙었다. 다시 지붕과 기둥은 남기되 단청 무늬를 줄이고 나무 사이를 조금 비워달라고 했다. 몇 차례 고치는 동안 내가 원하는 그림은 단순하면서도 뚜렷해졌다.
내가 바란 것은 서툰 손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밑그림이었다. 이미지는 클릭 몇 번이면 만들어지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내 손으로 선을 긋고 싶은 마음은 남는다. 선이 비뚤어지고 비례가 어긋나도 오래 들여다보며 그리는 시간이 좋 다. 펜촉이 종이를 지나가는 소리도 좋다. AI와 협업하다 보니 나는 더욱 그림 그리는 즐거움에 빠지게 되었다.
돌 지난 손녀와 놀 때도 익숙한 장면이 질문으로 바뀐다. 머리핀을 두 손에 감추자 아이는 양손을 번갈아 확인했다. 이번에는 손을 등 뒤로 돌려 숨겼다. 아이는 두 손을 살피더니 아장아장 내 등 뒤로 돌아왔다. 머리핀을 찾아 든 아이 는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좋아하는 책은 제목만 말해도 여러 권 사이에서 찾아냈다. 아이는 무엇을 기억하고 어떤 순서로 짐작했을까.
AI에게 물으니 눈앞에서 사라진 물건도 어딘가에 계속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시기라고 했다. 등 뒤까지 찾아온 것은 숨긴 곳을 짐작해 따라온 것일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한두 장면으로 아이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막연히 기특하다고만 여긴 행동을 구체적인 말로 정리하게 되었다. 다음에 놀 때 무엇을 눈여겨볼지도 생각했다. 아이가 정말 즐거워하는지는 결국 손녀의 표정을 보며 알아갈 일이다.
물론 AI의 답이 곧 정답은 아니다. AI는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매끄럽게 말할 때가 있다. 이유를 알았다는 기분과 실제로 이해하는 일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분은 같은 질문을 여러 AI에 던져 답변을 비교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나름대로 판단한다고 했다. 그렇게 여러 답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AI를 무조건 맹신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글을 보여줄 때 칭찬보다 어색한 대 목과 논리의 허점을 짚어달라고 한다. 그 지적도 내가 쓰려던 뜻에 맞는지 따져본다.
질문하는 행위는 사고력 요구
AI 답변 오류·한계 인지하고
여러 AI들 답변과 비교하면서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자세 필요
그분이 대면교육의 중요함을 함께 이야기한 것도 반가웠다. 아무리 AI가 발달해도 사람끼리 만나 소통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생각이었다. 강좌에서 찻물이 식기를 기다리는 동안 옆자리 수강생이 던진 물음에서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하고, 강사가 겪은 시행착오를 내 경험과 견주어본다. 쉬는 시간에 나눈 이야기가 다음 공부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도 책과 차를 배우러 갔다가 한 사람의 AI 사용기를 들었다. 사람과의 만남이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준 셈이다. 이 글도 그 찻자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분은 “사람이 음성으로 전하는 말의 온도도 AI가 언젠가는 따라잡을 것 같다.”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AI의 목소리에도 따뜻한 감성이 담길 날이 머지않아 올 수 있다.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AI는 설명을 잘해주지만, 누군가의 삶을 함께 살아 주지는 못한다. 그분의 답장을 읽으며 AI가 열어준 배움의 세계만큼이나,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생각을 나누는 아날로그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동영상과 블로그를 배우는 그분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을까. 예전에는 영상 하나를 만들려면 장비와 편집 기술이 필요했다. 이제는 AI가 대본을 함께 쓰고 자막을 달아준다. 문턱이 낮아진 만큼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가 더 중요해졌다.
“그러니 삶이 반짝거리는 느낌입니다.”
그분이 보내온 또 하나의 문장이었다. 더 많이 해내야 한다는 조급함보다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기쁨이 느껴졌다. AI에게 묻고, 돌아온 설명을 살피고, 부엌과 찻자리에서 직접 해본다. 그러는 동안 같은 일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오늘 저녁 나물을 무치며 생긴 궁금증이 내일의 작은 실험이 되고, 사진 한 장이 손수 그림을 그려보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질문 하나가 하루에 새로운 즐거움을 보탠다. AI야, 오늘은 나랑 무엇을 하며 놀까.
김종갑 대신대학교 교양학과 특임교수·(인천)재능대학교 유통상품기획과 특임교수·출판사 ‘오후의 글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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