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가 연구실을 떠나며 반납하는 연구 노트는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다. 수년간의 정성과 노력이 담긴 이 자산은 연구실의 시간을 넘어 이어 가는 공적 유산이다. 기초연구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져 간다. 느리고 더디지만, 긴 시간을 건너 결국 새로운 지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올 상반기 개인기초연구 과제 선정 결과는 현장 연구자들에게 남다른 신호로 다가온다. 4,628개의 과제가 새로 시작되었고, 특히 젊은 연구자 들에 대한 지원이 대폭 확대되었다. 이제 막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 '연구를 멈추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주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이번 정책은 연구자 중심의 지원 구조를 강화하며 예측과 지속을 중시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과제 수가 전년 대비 25% 증가한 것은 연구 기회의 실질적 확대를 의미하며, 특히 신진연구 과제가 75% 확대되고 세종과학펠로우십과 연계된 점은 핵심적인 발전이다. 박사후 연구원에서 신진 연구자로, 다시 중견 연구자로 이어지는 '성장의 사다리'가 안정적으로 보장될 때 비로소 건강한 학문적 성장주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은 서두른다고 결실을 맺는 분야가 아니다. 인공지능(AI)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긴 시간 축적된 질문이 예기치 못한 발견을 낳는다. 오늘의 작은 탐구가 십수 년 뒤 산업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과학사의 상식이다. 전체 과제의 47%가 지역에서 수행되고 외국인 연구자 선정이 증가한 점은 지역 균형 발전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라는 측면에서도 긍정적이다.
다만 과제 수와 예산의 양적 확대가 궁극적인 연구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지려면 더 정교한 평가 체계가 뒷받침되어야 연구의 중복과 비효율성을 막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책의 일관성이다. 세계 과학 강국들이 경기 변동과 무관하게 꾸준히 투자를 늘려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과학의 미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긴 시간'을 신뢰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학문 분야별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지원 체계와 법률적 뒷받침도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과학에 대한 지원은 미래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약속이 돼야 한다. 연구자가 미래의 연구환경을 예측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평생을 건 '느린 질문'에 매진할 수 있다. 연구실 책상 위 연구 노트처럼, 기초연구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학문의 혈맥이다. 지금의 투자는 조급한 성과주의를 넘어 미래 세대를 향한 사회적 약속이어야 한다. 그 약속이 흔들리지 않을 때, 대한민국의 기초과학은 단단한 걸음으로 국가 경쟁력의 뿌리를 감당하며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조윌렴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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