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만든 전력 수요 폭증…전선·변압기 시장 구조적 성장 기대
아시아 최대급 HVDC 케이블 생산 역량을 갖춘 LS전선 동해 해저 5동. 사진 제공= LS전선
[오피니언뉴스=박정훈 기자] 인공지능(AI) 생태계 확장이 반도체를 넘어 전력 인프라 산업까지 성장 국면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생성형 AI와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선·변압기·송전망 등 전력 관련 산업 전반에서 성장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전력망 투자 확대와 맞물려 국내 전선·전력 장비 기업들의 실적도 빠르게 개선되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이를 단기 호황이 아닌 구조적 성장 사이클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도 나온다.
AI 데이터센터 확산, 전력 수요 폭증
AI 산업이 전력 인프라 시장을 자극하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데이터센터'다. 데이터센터는 인터넷 서비스와 인공지능(AI) 연산 등을 처리하기 위해 대규모 서버와 저장장치를 한곳에 모아 운영하는 시설이다. 클라우드 서비스, 검색, 생성형 AI 등 디지털 서비스의 핵심 인프라로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시설이라는 특징이 있다. 생성형 AI 서비스와 클라우드 컴퓨팅 확산으로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설이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면서 전력 수요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AI 학습과 추론에 활용되는 고성능 서버는 일반 서버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소비한다.
국제 기관 및 글로벌 시장조사업체들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가 가파르게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24년 약 415TWh(테라와트시)에서 2030년 약 945TWh 수준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가트너(Gartner) 역시 글로벌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2025년 448TWh에서 2030년 약 980TWh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통상 우리나라의 연간 전력 사용량이 약 550~600TWh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데이터센터가 사용하는 전력 규모가 국가 단위 전력 소비량에 근접한 수준이다. 투자은행들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는다. 골드만삭스는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글로벌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2030년까지 최대 165% 증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AI 산업이 성장할수록 더 많은 전력과 전력 인프라가 필요해지는 구조다.
문제는 전력 생산보다 송전 인프라다. 데이터센터 건설 속도에 비해 전력망 구축이 상대적으로 더디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새로운 병목이 반도체가 아니라 전력망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로 전력 소비가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와 전력회사들은 송전망 확충과 전력 인프라 투자 확대에 나서고 있다.
미국 사업장에서 케이블 포설 작업을 수행 중인 대한전선. 사진 제공= 대한전선
글로벌 전력망 투자 확대, 장비 공급 부족 현상도
AI 전력 수요 증가가 가시화되면서 글로벌 전력망 투자도 빠르게 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노후 전력망 교체와 송전 인프라 확충 프로젝트가 잇따라 추진되고 있다. 특히 재생에너지 확대와 데이터센터 증가가 맞물리면서 초고압 송전망과 해저 케이블 수요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전력망 투자가 2030년까지 연간 약 7200억 달러(약 1070조 원) 수준으로 확대돼야 전력 수요 증가와 에너지 전환에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동시에 해상풍력 확대와 장거리 송전 수요 증가로 해저 케이블 시장도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조사업체들은 글로벌 해저 케이블 시장 규모가 2030년까지 약 400억~500억 달러 수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력 장비 공급 부족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변압기와 초고압 케이블은 생산 설비 확충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장치 산업이기 때문이다. 일부 변압기의 경우 납기가 2~3년 이상 걸리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공급 제약이 향후 전력 장비 기업들의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전 세계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전력 투자 사이클은 과거와 다른 특징을 보인다. 경기 회복에 따라 전력 수요가 점진적으로 늘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AI 데이터센터 확대와 재생에너지 전환, 노후 전력망 교체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투자 규모가 빠르게 커지고 있다.
국내 전선·전력 장비 기업도 성장 중
이 같은 흐름은 국내 전력 인프라 기업들의 실적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LS그룹(이하 LS)이다. LS는 2025년 주요 계열사 합산 기준 매출 45조7223억 원, 영업이익 1조4884억 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각각 9.1%, 23.1% 증가한 수치로 글로벌 전력 인프라 사업 확대 속에서 LS전선, LS일렉트릭 등 전력 계열사의 실적 성장이 반영된 결과다. 두 기업은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초고압 케이블과 전력 설비 수주를 통해 사업의 반경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대한전선은 해저 케이블과 초고압 송전 프로젝트 등 해외 전력망 사업 확대에 힘입어 지난해 매출 3조6360억 원, 영업이익 1286억 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전력 장비 기업 일진전기는 매출 2조446억 원, 영업이익 1512억 원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초고압 변압기 수요가 급증한 것이 주요 배경으로 꼽혔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단기적인 수요 증가가 아니라 구조적인 시장 확대 신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확대, 노후 전력망 교체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전력 장비 수요가 장기간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력 업계 관계자는 "AI 산업의 확대는 곧 더 많은 전력과 송전 인프라의 필요를 의미한다"면서 "전선과 전력 장비 산업이 AI 시대의 대표적인 인프라 수혜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현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현재 전력 및 전력 기기 시장의 업황은 단순한 단기 사이클의 정점이 아닌 전력 인프라 투자가 동반되는 구조적 성장 국면을 마주하고 있다"면서 "글로벌 에너지 전환과 AI 시대의 전력 부족 이슈로 인해 전력망 확충이 필수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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