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극화 시대: 대한민국 생존 시나리오] 저자 조한범 / 출판사 보다나은
최근 국제 정세는 어느 국가도 절대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는 ‘권력 공백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장기화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지역의 군사적 긴장 고조는 국제 질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러한 격변 속에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전략적 방향을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통일연구원 조한범 석좌연구위원이 집필한 신간 「무극화 시대: 대한민국 생존 시나리오」는 한국이 직면한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국익 중심의 다층적 생존 전략을 제시하는 이론적·정책적 보고서라 할 만하다. 이 책은 학계는 물론 정책 결정권자들 사이에서도 의미 있는 담론을 촉발시키고 있다.
‘무극화 시대’—질서 없는 세계의 도래
저자 조한범 박사는 현재의 국제 체제를 ‘무극화 시대’로 규정한다. 이는 냉전기의 미·소 양극 체제, 탈냉전기의 미국 단극 체제, 그리고 최근까지 논의되던 미중 중심의 다극 체제와도 구별되는 새로운 국면이다.
무극화 시대의 핵심 특징은 ‘압도적 리더십의 부재’다. 미국은 상대적 영향력 감소와 내부 정치의 분열로 과거와 같은 질서 설계 능력을 상실하고 있으며 중국 역시 성장 둔화와 구조적 한계로 단일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데 제약을 받고 있다. 이 틈을 타 인도, 유럽연합(EU),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른바 ‘미들 파워’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유동적 연대를 형성하면서 국제 질서는 파편화되고 있다.
조 박사는 “현재 국제사회는 위기 이후의 질서를 설계할 주체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무극화 상황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한다. 이는 곧 기존의 외교·안보 공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책은 이러한 무극화 구조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북핵 문제를 중심으로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신냉전 구도가 고착화되는 현실에서 한국의 전략적 입지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자산이 전 세계로 분산되고 고립주의 성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한미동맹이라는 기존 안보 축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독자적 대응 능력을 확보해야 하는 ‘이중 과제’에 직면해 있다.
저자는 북한의 핵 보유가 사실상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공포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그리고 지정학적 요충지인 한반도가 강대국 간 이해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율성을 확보할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저자 조한범 박사는 ‘무극화 시대’의 전쟁 양상이 더 이상 전통적인 군사 충돌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전장은 ‘공급망’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경제와 안보는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핵심 광물 등을 둘러싼 자원 민족주의와 자국우선주의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단편적으로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는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대신 글로벌 공급망에서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수행하는 ‘린치핀(Linchpin) 국가’로 도약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저자는 “한국의 생존은 우리의 기술력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필수적인가에 달려 있다”며 “과학기술이 곧 외교력으로 작동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이는 기술 주권 확보가 곧 국가 안보의 핵심 축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생존 전략, 세 가지 축
특히 조한범 박사는 대한민국이 무극화 시대를 돌파하기 위한 전략을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가치 기반의 ‘실리 외교’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본 가치를 유지하되, 국익 앞에서는 철저히 실용적 접근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대국 간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도 한국만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 과제로 제시된다.
둘째는 ‘다층적 네트워크’ 구축이다.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하면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 동남아시아 및 중동 국가들과의 협력 확대를 통해 외교적 선택지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무극화 시대에는 단일 동맹보다 촘촘한 협력망이 더 강력한 안전장치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셋째는 내부 결속과 전략의 일관성 확보다.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유지될 수 있는 초당적 국가 전략이 필요하며, 내부 분열은 무극화 시대에서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는 외교·안보 정책의 지속성과 예측 가능성이 곧 국가 경쟁력으로 직결된다는 점을 설파한다.
‘정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책
이 책은 정책 제안서나 미래 예측서라고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독자에게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대한민국은 변화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수동적 대응자가 아니라 능동적 설계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저자 조한범 박사는 냉혹한 현실 인식과 치밀한 전략 수립 없이는 한국이 국제 질서의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동시에 무극화 시대는 위기이자 기회라는 점도 강조한다. 기존 질서가 해체되는 순간, 새로운 규칙을 설계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책 「무극화 시대: 대한민국 생존 시나리오」는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시대에 국가 전략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좌표를 제시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앞서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를 묻는 데 있다.
결국 대한민국이 ‘무극의 파도’를 넘어 지속 가능한 번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하는 냉정함과 미래를 설계하는 전략적 상상력이 동시에 요구된다. 이 책은 그 출발점에 서야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 책과 함께 읽을 만한 도서로는 저자 페페 에스코바의 「다극체계가 온다」, 저자 즈비그뷰 브래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저자 이민규의 「국가핵심이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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